(3723)제79화 육사졸업생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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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9기생과 6·25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9·28수복 당일 중앙청에 맨 먼저 태극기를 다시올린 해병박정모소위 (56·대령예편·현신아조선대표)외 무용담이다.
박소위는 당시 해병대 재2대대 (대대장 김종기소령)제6중대 제1소대장이었다.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한국해병 3개 대대의 일원으로 참가, 서울수복전투의 앞장을 섰으며 9월28일 아침 6시10분 마침내 중앙청을 점령하고 태극기를 다시 올리는 감격을 안은 주인공이다.
인천상륙작전은 6월25일 북괴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맥아더」원수의 회심의 카드였다. .
여기엔 미7사단과 함께 한국군 제17연대, 그리고 한국해병대가 투입됐다.
9월15일 새벽 인천에서 상륙작전이 개시되는 것과 동시 낙동강을 따라 대치한 전선에서 연합군의 총반격이 시작됐다.
『남조선완전해방은 시간문제』라고 떠벌리며 낙동강전선 돌파에 총력을 쏟고 있던 북괴는 앞뒤로 공략을 받은 셈이 됐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연합군의 화력과 사기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총공격이 개시되자 전 전선이 붕괴, 퇴각하면서 아군은 한달음에 압록강까지 북진하게 된 것이다.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한 한미연합군은 공격개시 28분만에 월미도를 탈환하고 인천해안에 교두보를 확보, 맹렬히 저항하는 북괴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이며 전진했다.
18일엔 인천을 완전 수복했고 경인국도를 따라 서울로 진격해나갔다.
미7사단일부는 수원으로 전진, 낙동강 방면에서 북상하는 미 제1기 갑사단과 협력해 적의 퇴로를 차단했다.
당초 목표는 상륙 1주일내에 서울을 수복하는 것이었으나 실제론 이보다 1주일이 늦어져 9월28일에야 서울이 수복됐다.
이는 예상보다 완강했던 북괴군의 저항 때문이었다. 북괴는 인천상륙작전으로 등을 찔리게 되자 약2만의 병력을 서울에 집결, 최후의 저항을 했다.
상륙군은 19일 영등포에 진입하고 20일 선발부대가 주장을 건넜다. 한강에서부터 시내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한 블록씩 서울을 수복해 나가야 했다.
24일 김포에서 한강을 건너 마포방면으로 향한 한국해병대는 3개 대대였다. 제2대대의 박소위는 27일 남대문을 거쳐 시경-시청-광화문 네거리까지 진출했다. 박소위가 속한 제2대대는 거기서울지로방면으로 향하게 되어있었다.
박소위는 그날 낮 서울시청을 점령하고 그때까지 펄럭이던 북괴기를 화염방사기로 태워버리고 태극기를 올렸었다.
그때 종군기자로 상륙군의 최선봉부대와 함께 있던 박성환기자(경향신문)가 시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박소위를 현장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박기자가 박소위에게 『이승만대통령은 우리국군이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려주기를 바라고 있다. 박소위가 한번 해보면 어떠냐』고 권했다고 한다.
작전계획상으로는 중앙청은 미7사단제5연대와 우리해병 제1대대의 구역이었다.
그러나 박소위는 국가원수의 특명이 있는데 자신이 그 임무를 수행해야겠다고 생각, 중대장과 대대장에게 보고도 않고 중앙청방면으로 진출했다고 한다.
28일 새벽3시 중앙청을 향해 공격을 개시한 박소위의 제1소대는 건물마다 숨어 사격을 퍼붓는 적과 접전을 계속하며 동이 틀 무렵 중앙청에 돌입했다.
대원들은 청내에 숨어있는 적병을 수색하면서 박소위와 선임하사 양병수 2등병조, 최국방견습수병등 수명이 옥상으로 뛰어올라갔다.
옥상엔 그때까지도 북괴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옥상에 올라가 보니 돔을 오르내리는 쇠사다리가 파손돼 있었다. 박소위는 할수없이 로프를 걸어 오르기 시작했으나 총탄파편에 중간이 상한 로프가 끊어지는 바람에 하마터면 밑으로 떨어질뻔 했다.
다행히 주위에 있던 소대원들이 발목을 잡아 가까스로 위험을 면했다.
박소위는 소대원들의 혁띠를 모아 묶어 드디어 돔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28일 상오 6시10분, 중앙청엔 태극기가 다시 힘차게 나부끼기 시작했다. 서울이 적치에 들어간지 90일만이었다. 중앙청은 적이 퇴각하며 불을 질러 온통 화염에 싸여있었으나 그 가운데 나부끼는 태극기는 더욱 감격적인 광경이었다고 한다.
박소위는 이 중앙청선정 국기게양의 공을 함께 갔던 선임하사 양병수하사관에게 양보, 양하사관이 나중에 강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고 말하고있다.
무공에 미담까지 보탠 셈이다.
양하사관은 해병에서 장기 복무하다 퇴역, 몇 해전 병사했다고 들었다. <계속> 장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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