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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차 운전하다 사망한 소방관, '공무 중 사망'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춥다. 다녀올게.”

소방관 부부의 3번째 결혼기념일 아침은 평소와 같았다. 일찌감치 출근하는 곽기익(당시 32세. 경남 함양소방서) 소방관의 등 뒤로 아내 김은주(36) 씨는 “조심해” 한 마디를 전할 뿐이었다. 남편은 아내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

지난 2013년 12월 4일 오전 8시 52분. 자욱한 안개 속 소방차 한 대가 얼어붙은 도로 위를 달리다 미끄러져 도로 표지판에 충돌했다. 육중한 차체는 오른쪽으로 기울어 도로에 누웠고 운전석은 처참하게 찌그러졌다. 운전대를 잡았던 곽 소방관은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도착했을 땐 이미 숨져 있었다. 이날 운행은 출동로를 파악하기 위한 훈련이었다.

결혼기념일에 남편을 잃은 아내 김씨는 남편의 부재가 아직까지 믿기지 않는다. 충격으로 쓰러졌던 곽씨의 부모는 1년 이상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곽 소방관은 '순직'은 물론 '공무 중 사망' 처리도 되지 않았다. 인명을 구조하거나 화재를 진압하는 도중에 사망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유족의 마지막 바람인 국립현충원 안장도 같은 이유에서 ‘불가’다. 곽 소방관의 유해는 현재 사설 납골당에 안치돼 있다.

사고 후 유족들이 받은 것은 공무원연금관리공단이 지급한 사망위로금 1000만원이 전부였다. 딱한 사정에 함양소방서 동료들은 십시일반으로 조의금 4300만원을 모아 유족에게 전달했다. 전업주부인 아내 김씨는 한 순간에 가장을 여의면서 친정과 시댁의 도움을 받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공무원은 직무 중 사망하면 위험도에 따라 ‘공무상 사망’과 ‘순직’으로 처리된다. 공무원연금법은 순직공무원에 대해 ‘생명과 신체에 대한 고도의 위험을 무릅쓰고 직무를 수행하다가 사망한 공무원’으로 규정하고 있다. 순직 처리가 되면 유족연금 외에도 공무원 소득 월평균액의 44.2배 정도의 보상금이 지급된다. 또 국가유공자로 지정받을 수도 있는데 이 경우 국립묘지 안장과 자녀 학비지원을 받고 배우자 취업도 알선해준다. 그러나 공무 중 사망으로만 인정되면 국가유공자 지정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 보상금 액수도 순직자의 53%에 그친다.

유족들은 “처리 기준이 모호하다”고 주장한다. 곽 씨의 사건을 담당하는 박혜원 변호사는 “‘위험’이라는 기준이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명확한 기준이 없다”며 “처음에 단순 사망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순직 처리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고 말했다.

지난 2013년 도로에 쓰러진 고라니를 치우다 차에 치어 숨진 경찰관 윤태균 씨가 그런 경우다. 안전행정부는 인명을 구조한 게 아니라는 이유로 순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유족들은 행정소송을 냈고, 결과는 순직 처리였다. 같은 해 11월 서울대공원에서 호랑이에 물려 숨진 사육사 심재열(7급공무원) 씨도 같은 사례다. ‘고도의 위험 직무’ 여부를 놓고 유족들과 관련 기관이 서로 다른 주장을 했지만 사망 7개월 후 결국 순직 결정이 났다. 지난 2011년 고양이를 구조하다 건물에서 추락해 숨진 소방관은 지난해 6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처음에는 인명구조가 아니란 이유로 순직 처리가 안됐지만 대법원에서 ‘순직’ 결정을 내렸다.

소방공무원은 순직 처리가 되더라도 현충원 안장은 어렵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서 경찰과 군인은 공무의 범위나 종류에 관계없이 공무 수행 중 사망하면 모두 현충원 안장대상자로 인정되지만, 소방관은 순직하더라도 ‘화재 진압, 인명 구조 및 구급 업무의 수행 또는 그 현장 상황을 가상한 실습훈련 중 순직한 소방공무원’으로 제한돼 있다. 국가보훈처 등록관리과 김경희 주무관은 “어떤 대상이 더 위험한 업무를 하고 있는지 평가하는 것은 어렵다”고 밝혔다.

지난해 5월 개정된 법안에서는 소방관의 현충원 안장 기준에 ‘화재·재난·재해로 인한 피해복구, 지원활동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 사망한 경우’도 포함시켰다. 그러나 역시 모호한 기준으로 실효성 논란이 제기된다. 차종호 호원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소방공무원은 근무 특성상 화재진압 외에도 119에 접수된 구급활동을 하다가 변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며 “업무 형태에 따라 처우를 달리해서 제각각의 사례를 만들 게 아니라 기준을 명확히 세워서 군경과 같은 대우를 받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곽 소방관의 유족들은 이달 말 행정소송을 낼 예정이다. 지난해 3월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순직공무원 청구를 했다가 거부 결정을 받은 이후 내린 결정이다. 그러나 전망은 밝지 않다. 박혜원 변호사는 “종래 판례 등에 비춰볼 때 기각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이진우 기자 jw8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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