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가객(歌客) 김광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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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가객(歌客) 김광석의 열아홉 번째 기일이었습니다. 출근 길, 라디오에서 그의 노래가 들려옵니다.
하루 종일 그의 음악만 들려주는 카페도 있습니다. 각종 추모행사는 물론 SNS에서도 그를 기리는 글들이 이어집니다.
열아홉 해가 지난 그의 노래는 여전히 ‘나의 노래’ ‘우리의 노래’로 우리 곁에 존재합니다.

퇴근 후, 거의 20년 전 사진을 뒤졌습니다.
필름 보관용 비닐에 끼워져 있는 한 롤의 흑백필름을 찾았습니다.
흑과 백으로 반전된 필름 속의 남자는 하모니카를 목에 걸고 기타를 치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바로 가객(歌客) 김광석입니다.

온전한 기억이 떠오를 리 만무한 시간이 흐른 터라 가물가물하지만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1995년 8월의 어느 날입니다. 가요 담당이던 모 선배가 김광석 라이브콘서트 1000회 기념 공연을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당시 대학로 학전소극장에서 8월 한 달 내내 기념 공연이 있었습니다.
“이미 공연 안내 기사는 보도했기에 정식취재는 아니다. 하지만 의미가 있는 공연인 만큼 사진을 찍어두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습니다.
솔깃했습니다. 워낙 팬이었기에 기념공연을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설렜습니다.
바로 카메라를 챙겨들고 따라 나섰습니다.
(고백하건 데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필름에 촬영날짜를 기록해두지 않았습니다.
정식취재가 아니기에 신문 게재용 컬러필름이 아니라 흑백필름으로 촬영을 했습니다. 게다가 바로 현상하지도 않았습니다.
김광석의 부고를 접한 후에야 헛헛한 마음으로 현상을 했습니다. 필름을 묵혀둔 게 다섯 달 남짓입니다.)

좌석은 물론 복도며 무대 가장자리까지 관객들로 가득 찼습니다. 극장 측에서 무대 가장자리의 관객들 앞쪽 바닥에 자리를 잡아줬습니다.
따로 사진 촬영할만한 공간이 없어 미안하다며 겨우 앉혀준 무대 바닥, 오히려 좋았습니다.
정면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와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 그의 코 밑에서 호흡 소리까지 함께할 수 있으니 더 할 나위 없다 생각했습니다.

허나 공연을 시작하자마자 촬영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요즘은 어림없는 일이지만 당시엔 공연 중에도 촬영이 가능했습니다.)
첫 카메라 셔터소리에 제 스스로 화들짝 놀랐습니다. 마이크와 너무 가까운 탓에 카메라 셔터 소리가 천둥만큼 크게 들렸습니다.
일순간 극장 안의 모든 눈이 저를 향했습니다. 아무리 허가를 받았더라도 감당하기 힘든 눈총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김광석의 노래는 대부분 읊조리며 관객과 마음으로 교감합니다.
눈과 귀 그리고 온 마음으로 교감하는 찰나, 난데없는 셔터소리는 거의 테러였습니다.
그나마 관객들이 박수를 치며 함께할 수 있는 흥겨운 노래 일 때만 눈치껏 한 컷 한 컷 누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겨우 한 롤의 필름을 채웠습니다.
공연 후, 축하 뒤풀이 자리. 함께하자는 선배의 권유를 뿌리치고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 나왔습니다.
제 발 저리는 도둑의 심정과 다름없었습니다.

그리고 12월 어느 날, 가수 안치환의 공연이 있었습니다. 공연장에 도착하니 안치환의 부친상으로 동료 가수들이 하루씩 공연을 맡는다는 안내 글이 있었습니다.
그날의 대타 공연자가 바로 김광석이었습니다. 환불해서 되돌아가는 관객은 거의 없었습니다.
동료의 슬픔을 애도하며 차분하게 공연을 하는 그의 목소리, 그 어느 때보다도 애잔했습니다.
모든 관객의 눈총을 받으며 좌불안석하며 듣던 8월과 달리, 카메라 없이 듣는 12월의 목소리는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날 공연을 함께 봤던 이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낼 수 있는 가장 슬픈 목소리를 오늘 들었다. 다음에 기회를 만들어 꼭 이 사람 사진을 찍어야겠다.”
그리고 스무 날 남짓 후, 황망한 그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민망한 기억에 현상조차 하지 않았던 필름을 찾아 현상을 했습니다.
꼭 다시 사진을 찍겠노라 했었지만, 그날의 사진이 제가 찍은 가객(歌客) 김광석의 마지막 사진이 되어버렸습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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