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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봉화 금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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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금은 동양의 옛 악기다 「금」 이라고 짧게 발음해야한다. 복희씨가 다섯줄로 만든 것을 주나라 문왕이 두출을 보태 일곱줄로 개조했고, 우리나라에 와서는 거문고(현금) 가얏고(가야금)가 됐다. 어느것이나 선비가 성정을 고르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희애의 정서를 펴는수양과 도야의 그릇이다. 우리나라 2백49개 성씨 가운데 악기 이름을 성으로 택한 것은 봉화금씨뿐 수양 도야의 그릇을 표방한 성씨답게 수는 많지 않아도 「학문」과「도덕」의 가품을 면면히 이어온 가문이다. 전국에 약2만여명, 성별 인구순위79위 「희성」을 넘어 「귀성」에 든다. 경북봉화를 중심으로 안동·영주·영양·흥해등 일대에 집단거주해 부근에선 「토반」으로 꼽혔다.
본관은 봉화 단일본. 문헌에는 봉화외에 금포(계양)·강화등 몇몇 본이전하나 모두가 봉화의 분파이거나 거주지역의 표시로 본다. 봉화의 옛이름을 따 봉성금씨로도 일컬어오다 현재는 봉화금씨로 통일해 쓰고있다.
시조는 고려초 삼한벽상 공신에 오른 대사 금용식이다. 그러나 그 이후세계를 잃어버려 그의 6∼8대손으로 전하는 고려교종대의 명신금의를 중시조로 그로부터 세계를 헤아려온다.

<인구순 79위의 귀성>
우리 역사문헌에 금씨가 공식으로 등장하기는 중시조 금의가 첫번째.
고려의종7년 (l153년) 에 나서 설종17년(1230년)78세로 돌아간 그는 명종·신종·강종·고종의 4대를 섬기며 수태보문하시낭동중서문하시낭평장사판이부사에 오르고 내치·외교에 큰 역할을 한 당대의 명신이다.
금의의 자는 절지요, 초명은 극의로 본래 봉화현인이니 후에 왕이금포에 적을 내렸고 삼한공신 용식의 후예다.생김새가 기상이고 재기와 도량이 컸다.
과거급제 전에 청도의 감무가 되었는데 강직하여 굽히지 않으니 백성들이 가리켜 철태수라 했다.
고려사에는 그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금의는 충헌의 신임을 얻어 요직을 두루 거쳤다…강종이 즉위함에 금나라에서 사신을보내 책명할때 금나라 사신이 궁궐 정문으로 들어오고자 하거늘 조정에서는 이는 용납할수 없다고 서로 힐난했다. 왕이 의에게 명하여 금나라 사신을 설득케했다. 의가 금나라 사신에게 「만약 그대 나라의 황제가 우리나라에 왔을때 어느 문으로 들어올 것인가」 하고 물었다. 금나라 사신은「황제의 출입이 정문이 아니고 어느 문이겠느냐」고 대답했다. 이 말을 받아 의가「그렇다면 정문은 천자의 출입문인데 감히 신하가되어 정문으로 들어옴이 옳겠는가」하니 금나라 사신이 크게 탄복하여 주장을 굽히고 서문으로 들어왔다.

<고려의 명관 금의>
7O에 늙음을 이유로 벼슬 물러가기를 빌거늘, 벽상공신(벽에 이름을 기록하는 공신)을 가하고 물러가게 했는데 거문고와 바둑으로써 스스로 즐기다 고종17년에 돌아가니 78세라. 왕이 부음을 듣고 슬픔이 심하여 유사에게 명하여 상례를 하고 영렬이라 시호를 내렸다』(고려사열부).금의의 비문은 백운 이규보가 지었으며 여기에 기록된 바둑이야기는 우리나라 국기사에 최초의 비문으로 기록돼있다.
한림별곡에 금학사라 일컫는 이가 바로 금의다.
고려사 열부서 말한 한림별곡의 금학사를 본다.
『금학사의 옥순문생 금학사의 옥순문생 위 날조차 몇분이 닛고 (이하생략).』
한림별곡은 고려 고종조 한림의 여러 문사들이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명문·명집·명필·명주·명화·명악등 당대의 명류를 열거하는 가운데 금학사는 「죽순같이 수많은 문하생의 장관」으로 꼽히고있다.
조선조초기 금씨가는 한차례 시련을 겪는다.
다름아닌 제2차 왕자의 난에 연루, 일문이 화를 입은것.
금의의 후손 금인배는 딸을 태상이성주의 네째아들 방간 (회안대군)에게 시집보냈다. 이성 주와는 사돈간이 된다.
그러나 새 왕조가 열린지 10년도 안돼 왕자들끼리 왕위를 놓고 사법을 이끌고 서울 한복판에서 시가전을 벌여 서로 죽이고 죽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른바 두차례의 왕자 란.
금문의 사위인 방간은 2번째 왕자란에서 방달과 맞섰다가 패배, 잡혀 귀양가고 그와 함께 처족인 금씨들도 이의 영향을 받았다.
조선조에서 금문의 이름을 높인 인물은 세조조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금휘, 청백리로 대사성에 오른 금유, 그리고 금난수 금응내 금보 금응훈 금천 금제순 금서 금앙성 금응석 금응상등 퇴계문하일단의 학자들이다.

<이태조와 사돈간>
특히 금휘는 세종조에 문무양과에 급제하였고 세조 임금과는 주석에서주고 받은 시가 유명하다.
세조가『측석구현문기년 황겸시우보대천…』(어진 선비 구하려고 몇해를 근심했네.하물며 고흔 비가 이 강산에 고루 오네…)이라고 읊자, 휘는 ∵『풍운주회속당년 정시황하치일천』 (군신간에 좋은 잔치 올해에 속하니 황하수 바로 이때 1천년을 만났네…) 이라고 응답한 것이 이조실록에 전해온다.
전라 감사를 지낸 금유는 김종직과 시작교류를 가져 김종직 문집에는 그의 시가 많이 전해지고있다.
금문의 인물가운데는 벼슬을 했다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학문에 몰두하는 그런 가품을 지켜온 사람이 많다.
성재 금난수가 그같은 대표적 인물.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명종16년 과거에 급제한 그는 장례원사평의 벼술을 잠시 지내다 낙향,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했다. 덕조25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웠고 그 공으로 조정에서는 선무원종공신에 올리고 성주판가에 임명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않았다. 조선조중엽 금문과 퇴계 이황과는 깊은 인연을 맺는다 퇴계의 맏 며느리가 바로 금문의 딸. 그런데 이 혼사에는 일화가 있다.
당시 금씨는 봉화·안동 일대에서 행세하는 토박이 양반가문인데 비해 퇴계의 6대 선대는 아전이었다는 것 퇴계 자신은 이미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지낸바 있었고 그 학문으로 이미 명성이 널리 알려지던 때였으나 금씨집안의 완고한 노인들은 당시로서는 퇴계집안과의 혼사를 반대해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가까스로 혼사가 결정된다 (퇴계소부) .
한때 퇴계를 푸대접했던 금문이지만 이를 인연으로 많은 금씨네 젊은이들이 퇴계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과 문장으로 저마다 이름을 남기게된다.
그중에도 매헌 금보는 퇴계의 수많은 제자가운데 특출한 필체로 스승이 돌아간뒤 그 비문을 직접 쓴사람. 일세를 풍미했던 대유 퇴계는『기고봉 (대승) 이 아니면 비문을 지을수없고 금매헌이 아니면 글씨 쓸 사람이 없다』고 유언했다.

<이퇴계와도 인연>
한말 금석주는 일제침략에 국권이 흔들리는 위기를 맞자 1896년 인근유림들과 의병을 일으켜 경북북서부일대를 무대로 왜군과 싸웠다.
학문을 숭상하는 금문의 전통은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현재 금씨 지명인사 가운데 가장많은 분야가 학계.
금기창씨 (이박·의박)는 충남대학교교수를 정년 퇴직하고 문학박사 과정을 받기 위한 작 고중에 있으며 금장태씨 (철박) 는 『한국유구의 재조명』이란 저서를 내어 선현의 정신을 계승하는데 큰 공허를 했다. 그외 11명의 교수와 10명의 박사가 있다.
법조계엔 금용국·금병동(변호사) 금동우 진주지청장등 5명이 있다.
금기풍씨 (서예가)는 국전에만 20회나 당선하고 2번이나 특선한 원로서예가며, 대구지방에서는 금동식씨가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관계에선 금진호 상공부차관이 금문을 대표한다.
언론계에 중앙일보편집부국장겸 사회부장 금창봉씨, 의료계에 금동혁고려병원소아과장,금동일 신일병원장, 노동계에 금형춘전국체신노조 사무국장등이 활약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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