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1회 졸업생 40년만에 첫 동창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40년전 오늘, 1943년4월2일 안암골 보성전문의 문을 들어섰던 입학생들이 2일하오 40년만에 첫 동창회를 가졌다.
『교수님, 이렇게 정정하신 모습을 뵈니 더없이 기쁩니다.』 『자네의 머리도 어느덧 반백이 되었네 그려.』 「안암골 호랑이」1세들의 40년만의 홈커밍-. 동창회가 열리기 몇시간전부터 석탑교정에 하나둘 얼굴을 나타낸 70여명의 입학동기생들은 일제말기 기구한 조국현실 속에서 학병과 근로동원에 「학창」을 빼앗겼고 해방후엔 건국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야 했었던 파란만장했던 시절의 「동지」들이었기에 첫 동창회는 감회가 더욱 새롭다.
학생시절 수재로 날렸던 김진웅교우(현 고대법대학장)가 이날의 사회자로 뽑혔다. 「교우들의 모습도 많이 변했고, 모교도 옛날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지만 석탑교정에서 느끼는 향취는 여전합니다.』 금세 그의 눈자위엔 감회의 눈물이 맺혔고 목이 메었다.
옛 제자의 해후를 위해 노구를 이끌고 찾아준 유진오(당시 법과과장) 안호상(철학) 김재원(독일어) 박희성(영문학) 교수도 모습을 나타냈다.
이날 모임의 호스트 김원기교우(전 부총리·고대교우회장)는 『법과·상과에 1백명씩 2백명이 입학했는데 그동안 뿔뿔이 흩어져 이젠 절반도 남지 않았다』고 안타까와했다.
그동안 30여명이 타개했고 윌남하지 못한 교우도 20여명, 연락두절인 교우도 많아 84명에게만 초청장을 보냈다.
상과 이중재교우(전 국회의원)는 『7년 동안 4개의 교명(교명)을 거쳐야했으니 수난을 짐작할만하다』고 했다.
43년4월 입학당시 보성전문이었던 교명이 총독부의 강압에 따라 44년3월 「경성 척식경제전문」으로 바뀌고 해방후엔 보성전문으로 환원되었다가 46년9월 고대로개칭, 종합대학으로 출발했다.
조동표교우(일간스포츠 논설위원)는 『경성척식으로 교명이 바뀌면서 법과가 척식과로 둔갑했는데 농사짓는 기술만 가르쳐 학생들의 반발이 컸었다』며 당시 거름통을 지고 억지로끌려다니던 일을 회상했다.
척식과 과장을 맡아야 했던 유진오박사는 『더이상 교직에 머문다는 것은 치욕만 남길 뿐』이라며 교수직을 사임, 학생들로부터 존경을 받기도 했다.
이같은 수난속에서 46년 6월 보성전문 3년을 졸업한 학생들은 그해9월 신생 고대 2학년에 편입, 49년7월 고대 1회 졸업생이 된다.
학병과 근로동원은 해방전 학생들이 치를 떨며 회상하는 주제.
서태원교우(전 국회의원)는 『44년l월20일 김병국교우(전 수영연맹회장) 등 출진학생 1백여명이 경성역을 출발할 땐 전교생과 교직원이 전송을 나가 울음바다가 되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서씨는 결혼 후 학병에 끌려갔던 최진철교우(사업)의 부인이 학교에 찾아와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소연, 동급생들이 장례를 도맡았던 일이 기억난다고 했다.
학병에 쓸려가지 않은 학생들은 부평 조병창(조병창)이나 각 관청에 징발당해 「근로보국」을 해야하는 바람에 학교는 텅텅비어 있었다.
43년5월 전교생이 동원됐던 수원 서호저수지 준설공사에서는 설산 장덕수선생(당시 생도감)이 『일본인에게 우리의 억센 투지를 보여주자』는 연설로 학생들을 설득,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서태원교우는 서호근로동원 마지막날 자신의 고향집에서 소 한마리를 가져다 잡아놓고 모래사장에서 파티를 벌이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두각을 보였던 「서대문파」의 활동도 화제에 올랐다.
서대문파의 멤버는 김원기·김진웅·김용문(전 허정내각수반 비서질장)·김병국·고상겸(전 동방생명 사장)씨 등으로 서대문방향에 살았던 수재그룹.
이들은 매달 한번씩 김병국씨 집에 모여 토론과 연구발표회를 가졌는데 졸업 후에도 각별한 사이로 지낸다고.
해방 후에는 대학 최고학년으로서 「학도대」를 결성, 미군이 진주할 때까지 수도의 치안을 맡았었다는 자부심도 크다고 서태원교우는 자랑했다.
동창들은 각자의 주머니를 털어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을 마련, 더울 뜻깊은 하루가 됐다. <한천수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