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년 전 악몽 … 무조건 북쪽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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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비고 꽉 차고
5등급 위력을 가진 허리케인 ‘리타’의 접근으로 미 루이지애나주와 텍사스주에 비상대피령이 내려졌다. 23일(한국시간) 주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텍사스주 갤버스턴의 거리가 텅 비어 있고(上), 비행기로 휴스턴을 탈출하려는 수천 명의 인파가 조지 부시 국제공항 로비를 가득 메우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폭풍 전야. 날씨는 너무도 맑고 상쾌했다. 22일 오후 미국 텍사스주 남단 갤버스턴 섬. 뜨문뜨문 뭉게구름이 걸려 있을 뿐이다.

최악의 허리케인 '리타'가 곧(현지시간 24일 새벽) 덮칠 것이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갤버스턴 도심 풍경은 폭풍 전야를 실감케 했다. 텅 빈 유령의 도시. 휴스턴에서 갤버스턴으로 진입하는 45번 고속도로 6차로를 신나게 달려도 차 구경하기 힘들다. 관광객으로 늘 북적이던 황금해변 시월(Seawall)에서 사람 구경하기는 더 힘들다.

중심가 브로드웨이의 햄버거 가게와 편의점 네온사인도 모두 꺼졌다. 불 꺼진 창문엔 널빤지가 더덕더덕 붙어 있다. 유리창이 깨지거나 상점이 약탈당할까 급히 붙인 것들이다. 21일 내려진 강제대피령으로 갤버스턴 시민 대부분은 북쪽으로 떠났다.

차로 30분간 도심을 휘저어 어렵사리 인적을 찾았다. 카페 '핑크 돌핀'의 주인 오스카 플래커(54)의 설명은 이랬다. "강제대피령이 없었어도 다 떠났을 것이다. 여기 사람들은 1900년 허리케인에 도시 전체가 황폐화된 사실을 알고 있다. 얼마 전 뉴올리언스가 '카트리나'에 침수되는 것을 본 주민들은 이번 리타 소식에 지레 경악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곳에도 갈 곳 없는 가난한 시민들은 남았다. 주민 6만 명의 10% 정도가 도심 어딘가에 숨어 있다.

갤버스턴은 105년 전의 허리케인을 잊지 못한다. 1900년 4등급에 불과했던 이름 없는 허리케인이 섬을 덮치면서 최소 6000명이 희생됐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허리케인 참사다. 섬이 해수면보다 겨우 2~3m밖에 높지 않아 완전히 물에 잠겼다. 이후 갤버스턴은 높이 5m의 방파제 16km를 쌓아 서핑 휴양지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리타는 방파제를 타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갤버스턴을 떠나 휴스턴으로 돌아오자 상황은 정반대였다. 교통지옥. 대피 차량들이 한꺼번에 외곽 간선도로를 메웠다. 22일 시장과 주지사 등이 방송에 나와 "뉴올리언스의 악몽을 기억하라. 무조건 북쪽으로 가라"고 떠들어대는 통에 시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주변 주요 도시인 댈러스.오스틴.샌안토니오로 가는 45, 290, 10번 도로는 완전히 주차장이다. CNN은 "1시간 거리를 가는 데 13시간 걸린다"고 보도했다. 또 해안 주민들이 휴스턴 시내로 몰려들어 모든 호텔이 북새통이다. 공항터미널 종사자들이 대피하느라 출근하지 않아 한때 공항이 마비되기도 했다.

난리통에 미국 정유시설의 30%가 모여 있는 석유도시 휴스턴에 휘발유 품귀현상이 극심하다. 휴스턴 지역 300만 대의 차량 중 절반인 150만 대가 도시를 빠져나가면서 휘발유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뜨거운 고속도로에서 공회전으로 연료를 소진해 방치된 차들도 많았다. 와중에 주유소 주인과 직원들도 대피 행렬에 가담해 문 닫은 곳이 많았다.

한편 23일 아침 댈러스 남부 텍사스 고속도로에서 '리타'피난민 45명을 태운 버스에 불이 나 승객 24명이 숨졌다고 CNN 등 미 언론들이 이날 보도했다. 버스에는 요양원에 있던 노인 45명이 타고 있었다. 이날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에서 갑자기 연기가 나면서 불길에 휩싸인 후 폭발음이 들리면서 차체가 심하게 흔들렸다고 목격자들은 전했다. 댈러스 경찰 당국은 "화재는 브레이크 부분에서 일어났으며, 폭발은 노인 환자용 산소통 때문인 것 같다"고 밝혔다.

갤버스턴.휴스턴=남정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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