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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기 칼럼] 슬로 라이프를 위하여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08호 30면

노르웨이의 공영방송 NRK는 최근 12시간 동안 뜨개질 장면만 생중계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별다른 설명이나 편집없이 계속 이어지는 뜨개질 장면 중계는 이 방송국의 ‘느린 TV’ 미학을 대표하는 단골 소재다. NRK는 앞서 겨울철 땔나무에 관한 프로그램도 21시간 연속 방송한 바 있다. 장작 패기에서 쌓기 등에 이르는 단순한 과정을 그대로 화면에 옮긴 이 프로 역시 무미건조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 사람 다섯 명 중 한 명이 시청할 정도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왜 사람들이 이런 재미없는 프로에 열광하는 것일까. 『슬로 씽킹』의 저자 칼 오너리는 속도만을 추구해온 현대 사회의 피로감이 느림의 철학을 재조명하게 만들고 있다고 진단한다.

본격적인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모두가 ‘빠름, 빠름’만을 외치며 속도를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있다.

1995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니컬러스 니그로폰테 교수는 저서 『디지털이다(Being Digital)』에서 첨단 정보산업의 속도를 다음과 같이 그렸다. 새해 첫날 1센트로 일을 시작해 날마다 두 배씩 늘려 받는다면 한달 후인 1월 31일에는 얼마나 받게 될까. 그날 일당은 자그마치 1073만 달러나 된다. 미래의 디지털 정보 산업의 발전이 이처럼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이라고 20년 전에 예견했지만 오늘날에도 생생한 비유다.

속도는 디지털 시대의 화두다. 1481년엔 터키 왕의 사망 소식이 영국까지 전달되는 데 2년이나 걸렸다지만 지금은 세상의 온갖 소식이 불과 몇 분 내에 손 안의 스마트폰으로 들어오는 시대다. 미래학자들은 이제 2050년쯤이면 지구촌 인구 93억 명의 머리를 다 합쳐도 컴퓨터 한 대가 더 똑똑한 초고속 시대가 올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빛의 속도로 발전하는 디지털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은 즉각적인 효과에 대해 끊임없는 요구를 받는다. 느림과 여유는 마치 게으름과 모자람의 대명사처럼 치부되고, 사람들은 속도를 내기 위해 임시변통의 손쉽고 익숙한 해결책만을 강구하게 된다.

이런 세상이 되면 우리 모두에게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 주는 것일까. 노곤한 일요일 오후 불현듯 회사 책상 위의 못다한 업무 서류가 생각나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들. 신속성이 압도하는 현대인의 생활은 늘 피곤하다.

빠름과 서두름만 앞세우는 ‘퀵 픽스(quick fix)’에 중독된 땜질식 처방을 버리고 모든 문제를 참을성 있게 철저히 해결하는 법부터 배우자는 움직임이 바로 ‘슬로 운동’이다. 빠르게 하는 것보다 잠시 멈추고 제대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세계를 구할 시간이 한 시간 주어진다면 우선 문제가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데 55분을 쓰겠다”는 아인슈타인이나 “나무를 베라고 6시간을 준다면 처음 4시간은 도끼 날을 가는 데 쓰겠다”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말이 새삼 되새겨지는 대목이다.

오너리는 “슬로 생활이 달팽이처럼 느리게 사는 것이 아니다”며 “모든 일을 느리든 빠르든 상관없이 걸맞은 속도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움직임은 이제 슬로 푸드, 슬로 시티, 슬로 워크, 슬로 테크놀로지, 슬로 패션까지 이어지고 있다. 속도를 줄이거나 과거로 회귀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고, 경쟁에 지친 마음과 몸을 돌보자는 새로운 사회 트렌드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새해 벽두부터 남북 대화에서 각종 정치 현안에 이르기까지 해결해야 할 일이 산적해졌다. 이럴수록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 퀵 픽스의 유혹에서 벗어나 완속(緩速)의 가치를 떠올려야 할 때다. 게으른 선비 책장 넘기듯 벌써부터 신년 달력의 맨 뒷장까지 들어올리며 시간이 없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올해에는 모든 일을 근본으로 돌아가 더 천천히, 느긋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홍병기 정치 에디터 klaat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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