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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드러낼 조선의 왕실유물|-덕수궁에「궁중 박물관」건립…86년 개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일반에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조선조 왕실유물들을 공개전시하는「궁중박물관」이 세워진다. 문공부가 15일 새로운 문화예술공간조성의 하나로 확정한 이궁중박물관의 설립장소는 현 서울덕수궁안의 국립현대미술관 자리-
덕수궁의 조경을 순수한 한국식으로 바꾸고 창덕궁소장의 왕실유물 l만7전여점을 옮겨 전시한다는 것이다. 개관은 국립현대미술관이 과천남서울대공원안에 새로 건립, 이전(83∼86년)되는 86년 가을-.
금관·각종 장신구등의 신라·백제궁중유물은 각 박물관에 널리 공개 전시된데반해 가장 가까운 역사속의 조선조 왕실유물은 그동안 깊숙한 구중궁궐 창고속에 방치(?)된 비공개의 높은 담벽을 쌓고있었던게 사실이다.
특히 창덕궁참 창고 및 각궁궐에 산재해있던 조선조 궁중유물들은 구한말부터 60년대초까지 관리소홀과 일제의 약탈, 6.25전란. 4.19혼란기, 화재등으로 상당량이 유실되는 비운을 겪었다.
그래도 현재 남아있는 조선조궁중유물은 3만여점에 이르는「대량」이고 그 내용이 의상·장신구·회화·가구·주방기구등 아주 다양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일품으로 꼽히는 유물은 국보중의 국보로 평가되고 있는『천상렬차분야지도석판』『정조대왕능행도8곡병』과『어가』『화각빚』『연화향낭노리개』등-.
태종연간(1400년대초)에 만들어진 과학기구인『천상렬차분야지도』의 석판(가로2.5, 세로l.5m)은 제3공화국말 고위층 인사가 창경원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지적, 창덕궁 유물창고로 옮겼다. 정조가 사도세자묘를 참배갈 때 탔던 가마는 보존상태가 아주 온전하다.
왕비가 여름옷에 달았던『연화향낭노리개』는 지금도 그 그윽한 향냄새가 풍기고 있다는것-.
주방기구와 가구류에는 청나라것을 비롯,「루이」왕조스타일의 프랑스제등 화려한 국내의 제품들이 다수있고 회화류에도 일본인들이 이왕가에 선물했던 l900년대 일본그림들까지 망라 돼있다.
이밖에 태조·영조·정조·숙종·혜종·철종·고종등 7명의 왕어진도 손꼽을만한 유물-.
그러나 도자기 귀금속류의 장신구등은 전해오는 이야기나 예상과는 달리「전무」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조 궁중유물의 본격조사는 지난 80년여름 서화·전적·염직·무기류등으로 나누어 전문가가에게 의뢰, 실시했던게 처음이다. 물론 이보다 앞서 60년대 후반 구왕실재산관리총국이 5년동안에 걸쳐 조사한 일이있고 한·일합방후 총독부 이왕실재산관리처가 유물조사 및 등록대장을 만든 일이 있다.
도자기·귀금속류·회화등이 많이 횰러나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창덕궁소장유물 유출의 생생한 일화 한토막-.
『고종황제가 방석으로 사용했던「호피」를 6.25전쟁중 한 미군병사가 가져갔다.
구왕실재산관리처는 사실을 확인 주한미대사관의 협조를 얻어 미국에 가있는「호피」를 가까스로 찾아왔다. 그런데 이「호피」가 제1공화국시절 정계권력자 L씨에게 선물로 보내져 4.19후 그의 가재률 길바닥에 내다 불태울 때 쌓여 불타고 말았다.』
이 일화는 마침 공교롭게도 「호피」를 찾는데 주역이었던 B씨가 L씨의 가재가 불타는 현장을 목격, 확인한 생생한 증언이다.
일제와 60년대에 작성된 유물대장은 오히려 보관유물량이 더많은 경우가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일제의 이왕실재산관리처, 해방후의 구왕실재산관리처, 구왕실재산관리국등을 거치면서 관리돼온 조선조궁중유물은 6.25전쟁중 부산으로 일부 가지고갔다가 보관창고의 화재를 만나기도 했고, 56년 실화나 방화냐 하는 의구심까지 불러일으켰던 창덕궁사무실 화재등으로 많은 유실의 비극을 겪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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