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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6)제79화 육사졸업생들, 여순반란사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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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아프리카나 중남미에서 쿠데타가 많다보니 하사관들이 주동이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우리는 그런 보도를 접할때마다 코웃음을 친것도 사실이다.
하사관들이 장교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탈취하는 정치적 하극상이었으나 성공한 예도 있지만 대부분은 실패했다. 군대규모가 작은 신생국가등에서 있었던 현상들등이다.
그러나 그같은 하사관의 쿠데타는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독립직후인 48년10월의 여수-순천반란사건이 그것이다.
당시 여수에서 창설되어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연대에서 연대 인사계인 지창수상사가 좌익 쿠데타를 일으켜 연대 장교들을 살해 또는 억류한후 연대를 장악하여 소위「인민해방군」으로 개편하고 스스로 연대장이 되어 부대를 지휘했다.
그리고 부대를 이끌고 여수시내로 나가 경찰서를 습격하여 경찰관들을 학살하고 건물에다 불을 질렀다. 시내의 모든 관공서와 공공건물에는 북괴기가 게양되고 다음날엔 학생들이 중심이되어 소위 인민혁명의 승리를 축하하는 시가행진까지 벌였다. 모든 행정이 반군과 이에 동조한 민간좌익세력에 의해 시행됐다. 우익인사의 대량학살이 단행됐다.
이같은 사건은 즉시 순천으로 확대됐다. 여수에서와 똑같은 일이 순천에서 반복된 것이다.비록 한때나마 이지역은 공산천하가 됐던 것이다. 가히 여순코뮌이라고 함직도 했다.
l주일만에 질서는 회복됐지만 반란군의 주력은 지리산으로 도망하여 저항과 추격·토벌전이 계속됐다.
1주일동안 여수에서만도 관민 l천2백명이 학살되고 국군 51명이 전사 또는 살해됐다. 집이 불타거나 전파된것이 1천4백채이고 이재민이 l만여명이나 됐다.
반란군은 3백92명이 사살되고 l천5백여명이 생포됐다. 이들은 따지고 보면 그 일대에서 지원해 국군이 된 우리의 병사들이었다. 비극중의 비극이 아닐수 없다.
국군은 창설이후 여러가지 어려운 고비를 넘겨야 했다. 처음에는 미고문관들의 과잉간섭으로 인한 갈등이었고 이어 경찰과의 충돌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군은 계속 망신과 설움을 당해야했다
고문관은 미군정하에서 강대한 통치권을 배경으로하여 우리 경비대를 마음대로 주무르려했다. 경비대보다도 무장과 조직이 강력했던 경찰은 군정의 실력자요 미국으로부터 강력한 신뢰를 받고있던 조병옥경무부장의 비호아래 경비대를 경찰보조대 정도로 경시했던것이다.
군과 경찰의 갈등은 전국 각지에서 벌어졌던 대소 시비·충돌사건을 거쳐 제주도의 4·3폭동사건에서는 작전문제를 두고 대결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기서도 군은 결국 경찰의 작전방침에 뒤쫓아 따라가야했다.
그러나 더 큰 군의 아픔은 좌익으로부터 온 것이다. 제주도에서는 군에 침투한 다수의 좌익이 지휘관을 살해하거나 부대를 이탈하여 반란군에 가담하는 사태에 이르렀었다.
이같은 군의 모든 갈등과 모순이 통합·축적됐다가 곪아 터진것이 바로 여순반란사건이다.
제주도사건은 대체로 군영에서 3기까지가 치른 사건이라면 여순반란은 6기까지가 치러냈다고 할수 있겠다. 토벌작전이 장기화함에따라 그후의 육사출신들도 동원됐지만 역시 주역은 될수 없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같은 비극적인 사건이 군내에서 일어나게된 근본적인 원인은 미군정당국의잘못된창군원칙에있었다고본다.
당초 군정당국은 군의 정치적 중립과 군내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원칙을 정해 놓았다.
장교를 선발할때는 신원조회를 해서 공산분자의 잠입을 봉쇄해야한다는 이응준·원용덕장군등 창군원로들의 주장을 군정당국자들이 일축해버렸다. 그래서 지원서를 내고 전형절차만 거치면 좌익계도 무난히 장교가 될수 있었다.
사병들의 경우는 더했다. 당시 연대편성을 서둘러 연대장들에게 조기편성경쟁을 시켰다. 먼저 끝낸 연대장은 유능한 장교로 표창됐다. 연대장들은 기간요원을 각지로 보내 닥치는대로 장정들을 끌여들였다.
이런 판에 좌익계를 가려낼 여지는 전혀 없었고 안다해도 막아낼 길이 없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군부대는 46년1월 태릉에서 창설된 1연대였다. 1개대대의 편성을 막 끝내고 이를 축하하는 시가행진을 광화문거리에서 벌였다.
맨 앞에는 대대장겸 1중대장인 거구의 채병덕소령이 배를 쑥 내밀고 걸어가고 있었고 그뒤에는 일군복·만군복·중국군복등 가지각색의 군복에다 계급장도 없는 군인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처음 우리군대가 창설됐다해서, 또 오랜만에 보는 군대행군이라 해서 많은 시민들이 나와 박수도 치고 손도 흔들었다. 그때 구경꾼중 한명이 옆에있는 자기친구를 행군대열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너도 군대에나 들어가라』하여 그가 그대로 군인이 됐다는 얘기도 있다.
당시는 이렇게 군대에 들어가기가 쉬웠다. 입대할때는 장차 수립될 우리정부에 충성을 다한다는 선서를 했다. 따라서 군인들은 부대내에서 공개적으로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기도 하고 밤이면 좌익계의 집회에 참석하기도했다. 장차 공산주의정부가 들어서게 될지도 모르지 않느냐, 그 정부에도 우리는 충성하기로 선서하지 않았느냐 하는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이렇게하여 붉게 물든 군의 일부가 말썽을 일으킨것이 바로 14연대의 여순반란이요, 6연대의 대구폭동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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