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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열 총재의 말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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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윤 기자 중앙일보 편집국장
김종윤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의 목적은 ‘물가 안정과 완전 고용’이다. 한국은행법 1조에는 ‘물가 안정, 그리고 금융안정’이 목적이라고 돼 있다. ‘물가 안정’은 중앙은행의 최상위 사명이다. 일본은행도 그렇고 유럽중앙은행(ECB)도 마찬가지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앙은행의 역할은 좀 더 확대됐다. Fed와 일본은행이 양적완화를 단행했다. ECB와 한국은행은 통화 완화정책을 폈다. 경제회복을 위해 중앙은행들이 과거와 달리 앞다퉈 돈을 확 푸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중앙은행들이 여전히 답을 못 찾는 게 있다. 바로 ‘물가’다. 이번엔 종전과는 정반대다. 뛰는 물가를 잡는 게 아니라 자유낙하하는 물가를 끌어올리지 못하는 게 문제다. 물가는 올라도 문제지만 너무 낮으면 더 큰 문제다. 디플레이션은 경제를 파국으로 몰고가는 암적인 존재다. 치솟는 물가를 잡는 것 못지않게 지하로 추락하는 물가를 떠받치는 것도 안정이다. 일본과 유로존(유로화 사용 18개국)은 이미 디플레이션 국면에 들어갔다. 한국도 위험하다. 그나마 유일하게 성장궤도를 탔다는 미국조차 저물가 상태다.

 앞으로 물가가 뛸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빚에 짓눌린 가계, 성장동력을 못 찾는 기업이 소비와 투자를 확대할 리 없다. 이럴 때 중앙은행의 역할 중 하나가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확산시키는 것이다. 앞으로 물가가 오를 것 같다는 기대가 생기면 사람들은 소비를 늘리게 된다. 그러면 총수요가 늘어나면서 불황을 벗어날 수 있다.

 한국은행을 비롯한 중앙은행들은 이런 노력을 하고 있다. 엄청난 돈을 푸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오히려 물가가 더 떨어질 것 같다는 디플레이션 기대심리가 퍼진다. 이 대목에서 중앙은행의 본질이 드러난다. 중앙은행의 임무를 잘 이해하는 소비자들은 만약 경기가 회복되면 중앙은행이 다시 돈줄을 죌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중앙은행이 본분을 잊고 물가 상승을 놔 둘 것이라는 믿음이 확산돼야 소비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먼 교수는 “통화정책은, 중앙은행이 무책임할 것이라는 믿을 수 있는 약속을 할 때만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이런 믿음, 불가능하다. 독립이 보장된 선진 중앙은행은 절대 무책임하지 않다. 특히 한국은행은 강하지는 않지만 유능한 조직이다. 중앙은행의 사명에 투철하다. 이는 현 국면에서 기준금리 좀 더 내린다고 경기가 회복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금 단계에서 중요한 건 구조개혁”이라고 강조한다. 이 총재의 말이 옳다. 미국 경제가 부활한 것도 구조조정이 밑거름이 됐다.

 2015년 경제 전망도 어둡다. 이런 때일수록 모르핀 주사 같은 단기 부양책의 유혹을 버려야 한다. 구조개혁이라는 고통을 감내해야 앞날에 희망이 생긴다. 푸른 양의 해 을미년(乙未年)은 한국 경제의 환부를 도려내고 근본 치료를 할 마지막 골든 타임이다.

김종윤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