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박신영의 명작 속 사회학 <49>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홍주연
박신영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의 주인공 제제네 집은 가난하다. 성탄절 만찬으로 칠면조 요리는커녕 겨우 포도주에 적신 빵 한 조각만 먹는다. 장난이 심해 어른들에게 매를 맞곤 하지만 마음 착한 제제는 동생 루이스라도 선물을 받게 해 주고 싶다. 먼 거리를 걸어 공짜 선물을 나눠주는 곳에 가지만 이미 늦었다. 실망한 동생이 울자 제제는 자신의 장난감을 고쳐 주겠다며 달랜다. 선물도 만찬도 없는 크리스마스. 내가 읽었던 동화 중 가장 슬픈 성탄절 장면이었다.

한편, 궁금하다. 왜 어린이들은 성탄절에 선물을 받는 걸까? 부잣집 아이들뿐만 아니라 가난한 집 아이들도 선물을 기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왜 제제는 같은 아이인데도 자신보다 어린 동생은 꼭 선물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서구 사회의 축제들은 중세 기독교 전통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 따져보면 기독교 축제들은 고대의 다른 종교 축제를 계승한 경우가 많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는 로마제국 각지에서 각각 다른 날로 기념되던 예수 탄신일을 12월 25일로 정한다. 그날은 원래 로마의 태양신 탄생 축제인 동지 축제를 기념하는 날이었다. 또 얼마 전인 12월 17일은 로마의 농경신 사투르누스를 기념하는 사투르날리아 축제일이었다. 이날 사람들은 서로 선물을 교환하고 잔치를 벌였다. 이 두 축제 풍습에 예수 탄생을 기리는 기독교 행사가 결합돼 성탄절 축제가 생겨났다고 학자들은 본다.

하지만 기독교와 상관없이 동짓날 즈음 겨울 축제를 벌이는 풍습은 전 세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농경사회에서 중요시한 설날도 크게 보아 동지 축제의 연장선에 있다. 동지가 지나면 낮은 다시 길어진다. 곧 봄이 온다. 음력에서는 설날부터 봄이고, 봄이 오면 만물이 살아난다. 씨를 뿌려 풍요로운 수확을 기대할 수 있다. 즉 동지와 설날, 봄은 모두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우리 조상들이 동지를 ‘작은 설’이라 부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고대인들은 동지에 맞춰 다른 세상에 있던 조상의 혼령이 찾아와 후손들에게 풍요의 축복을 베풀어 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영적인 능력을 아직 잃지 않고 있는 어린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었다. 아이들을 통해 영적인 존재들의 축복을 받길 원했기 때문이다. 이 풍습이 이어져 아이들은 성탄절에 선물을 받는다. 기독교 문화권이 아닌 곳에서는 설날에 선물이나 용돈을 받는다. 어릴수록 영적인 세계와 통하는 힘이 더 강하다고 믿었기에 어른들은 큰 아이보다 어린 아이가 받을 몫을 더 꼼꼼히 챙긴다.

자, 일 년 내내 울던 떼쟁이 동생은 선물을 받았는데 자신은 좀 컸다고 못 받아 억울했던 친구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조금 억울함이 풀렸는가? 사실 억울한 것으로 말하자면 이 글을 쓰는 나도 만만찮다. 다른 세상의 영적인 존재와 소통할 수 있는 존재는 어린 아이만이 아니다. 노인들도 곧 다른 세상으로 건너갈 존재이기에 역시 조상의 혼령과 소통이 가능하다. 그러기에 설이나 추석 등 농경사회의 축제일에는 노인들 역시 선물이나 용돈을 받는다. 명절날 노인을 우대하는 것은 효도 관념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해 풍요와 축복을 받길 원하는 인류사회의 오래된 풍습이기 때문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나 같은 어중간한 연령대의 어른은 늘 주기만 하고 받지는 못해 좀 억울하다.

박신영『백마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저자, 역사에세이 작가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