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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盤上)의 향기] 술과 藝와 無心 … ‘낭만 기객’ 김인 세상과 반상을 잇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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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호 26면

젊을 때의 김인(왼쪽)이 1977년 마등령에서 조훈현과 함께했다. 등산으로 전국을 누볐던 김인과 조훈현은 특히 북한산과 설악산을 좋아했다. [사진 한국기원]

“김인 8단과 조훈현 7단. 두 사람이 대국할 때엔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것은 조 7단과 서봉수 5단의 대국 분위기와는 전혀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따뜻함이었다. 상대방이 잘 두면 잘 둘수록 뭔지 고맙고 든든한 그런 관계, 승부 자체보다 더욱 커다란 신뢰의 안개가 두 사람 사이에 감돌고 있었다.”

<17> 영원한 국수

1978년 바둑 평론가 노승일(79)의 관전기 일부다. 승부는 차갑다. 반상은 전쟁터. 그런 세상에서 따뜻한 훈풍이 도는 바둑이 있다는 것은 실로 의외다. 하지만 실제 그런 것이 있었다. 김인(金寅·1943~) 국수에게는 그런 힘이 있었다.

조남철(1923~2006)은 한국의 바둑을 열었다. 45년 한국기원의 모태인 한성기원을 창립해 현대 바둑을 보급했다. 구한말 사랑방 놀이에서 시작한 바둑을 사회적 차원으로 일으켰다. 바둑은 성장했다. 64년엔 프로와 아마를 구별했고, 프로 기사는 34명이었다. 기전 수는 4개(국수전·왕좌전·최고위전·청소년배). 64년 전문지 ‘기원(棋苑)’이 나온 데 이어 ‘바둑세계’와 ‘기계(棋界)’(67년 ‘바둑’으로 제호 변경)가 창간되는 등 바둑은 자리를 잡아갔다.

하지만 바둑과 세상은 뭔가 소원했다. 바둑 인구가 적은 탓도 있었지만 사회적으로 바둑에 대한 살가운 공감대가 부족했다. 조남철 1인 천하라 바둑계의 무기력증도 컸다. 비슷한 나이의 김봉선 5단이나 김명환 4단 등 도전자가 나섰으나 상대도 되지 않았고 변화가 없어 애기가들도 시무룩해했다. 조남철을 넘어서는 인물이 없었다.

세속적인 정치는 말할 것도 없지만 저 세상을 말하는 종교만 해도 예배의 대상이 없다면 종교는 없다. 바둑도 그렇다. 바둑을 상징하는 인물 없이는 바둑은 없다. 60년대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1920~2010) 9단과 린하이펑(林海峰·72) 9단이 없었다면 일본 바둑계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릴 수가 없을 것이다. 사카다의 승부 철학과 린하이펑의 태산 같은 자세는 곧 바둑의 얼굴이었다.

김인 국수가 즐겨 쓰는 휘호 ‘구현(鉤玄·현묘함을 낚다)’. 바둑은 현현(玄玄)으로 표현되곤 했다.

일본 유학 땐 초단 건너 뛰고 3단 ‘직행’
바둑은 문화적인 그 무엇이다. 동어 반복 같지만 ‘바둑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인식이 투사된 그 무엇이다. 그 때문에 언제나 바둑은 변했다. 사카다가, 린하이펑이, 조남철이… 모두가 바둑에 살을 보탰다. 이미지를 키웠다.

그처럼 누군가가 넓은 상징성으로 바둑의 격을 변화시키는 그런 과정이 없다면 바둑이 문화로 성장하기란 매우 힘들다.

남쪽 강진 바닷가에서 자맥질하던 떠꺼머리 소년이 있었다. 어깨 너머 배운 바둑에 재능을 보여 소년은 55년 서울로 바둑 유학을 떠났다. 조남철이 개인 기원으로 별도로 운영한 송원기원에서 바둑을 공부했다. 이학진(1911~2009·구한말 의친왕의 사위)씨 등 바둑계 인사들이 알게 모르게 아낀 소년은 단연 두각을 나타내 58년 전국 아마추어 대회 우승 이후 프로로 입단했다.

62~63년 일본 유학 당시엔 파격적으로 3단을 인허받았다. 초단을 거치지 않은 3단 인허는 우칭위안(吳淸源·1914~2014) 이후 그가 처음이었다. “김·죽·림(金·竹·林)이 장래 바둑계를 짊어지리라”는 말이 일본 바둑계에 떠돌았다. ‘죽’은 일본의 오다케 히데오(大竹英雄·72) 9단이고 ‘림’은 대만 출신의 린하이펑이다. 물론 ‘김’은 한국의 김인이었다.

김인은 63년 겨울 군 입대 때문에 한국에 돌아왔고 이후 국내에서 바둑에 집중했다. 그러곤 66년 조남철의 국수 10연패를 저지하면서 그의 아성을 깨나가기 시작했다. 60년대 말에는 7개 타이틀을 모두 휩쓸었다. 국수 6연패, 왕위 7연패(통산 8회) 등 77년까지 획득한 타이틀만 30개를 넘어섰다. 월간 ‘바둑’엔 그의 얼굴이 화보를 장식했으며, 신문에서도 그의 이름은 언제나 나왔다. 조남철을 넘어선 그는 곧 한국 바둑의 얼굴이 되었다.

얼굴에 눈·코·귀가 있듯이 그는 세 가지 인연을 통해 바둑에 살을 붙였다. 술과 예(藝)와 무심(無心)이 그것이다.

첫째, 그는 술을 잘 샀다. 그가 타이틀 최종국을 둘 때엔 기사들이 모였다. 끝난 다음에 술자리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1년에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상금의 반 이상을 술자리에서 풀었다. 동료가 안 보이면 “아무개 어디 갔나?”하고 찾았다. 그러기에 너나없이 모였다. 관철동 중국집 ‘중원장’은 그가 자주 간 술집이다. 김인은 낭비벽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낭만적이고 정을 잃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런 풍경은 뒷날엔 사라졌다. 70년대 중반부터는 승부가 낭만을 앞서는 소위 실력주의 시대가 들어섰다.

자신부터 술을 좋아했다. 그는 “10대 후반부터 마셨다. 바둑을 두기 위해 지방에 가면 언제나 술이 있었다”고 했다. 나이가 한참 많은 신동문(1928~93·시인)과도 교유했고 고은(81·시인)과도 자주 마셨다. 따질 게 없었으며 마음만 맞으면 됐다. 마음을 허물면 현실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그와 만나는 사람들은 바둑 동네를 가까이 여겼다.

둘째로 그는 바둑의 예(藝)를 살렸다. 기(技)에 치우치지 않도록 했다. 박치문(66·한국기원 부총재) 바둑전문기자가 “그는 자신의 바둑에다… 자신의 인생관을 그대로 도입시키고 있다”고 일찍이 간파했듯이 인생의 의미를 바둑에 투사했다. 그것이 예였다. 안영이(79·바둑 서지학자) 선생이 지난 4일 장승백에서 열린 송년회 자리에서 그때를 회고하며 감탄했다. “아, 당시엔 정말이지 대국이 진지했어요.” 김인은 그 무언가를 찾으려 했다. 비록 그것이 인간이 바둑에 덧씌운 허명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예는 허명 비슷한 그런 것이고, 도인은 허명으로 실체를 얻는다.

기보 백 80을 보고 김인은 돌을 던졌다.

철학은 미(美)를 떠날 수 없고 철학을 떠난 미도 없다. 그는 모양을 중시해 모양이 어긋나는 것을 참지 못했다. 69년 강철민(1939~2002) 5단과의 최고위전 4국에서는 80수 만에 돌을 던져 친구인 강 5단마저 “어, 이거 왜 이러나. 왜 던지나” 하고 되레 놀랐다(기보). 타이틀을 잃었다.

미는 자긍심을 높인다. 후배들이 경외했고 바둑을 지망하는 청년이라면 누구나 만나보고 싶은 인물이 되었다. 기술이 먼저인 승부 세계지만 승부 외에 경외하는 그 무엇이 없다면 바둑은 기술로 끝날 뿐이다.

셋째, 그는 무심으로 승부를 대했다. 대국 때 각박하지 않았다. 평온했다. 조훈현(61) 9단에게 타이틀을 물려줄 때엔 훈훈한 정마저 감돌았다. 시퍼런 기운일랑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승리 그 자체를 추구하는 현대 바둑의 흐름 속에서 악착같지 않음은 하나의 낭만성이자 김인의 담백함을 보여주는 매력이 되었다.”

바둑 잡지서 인기 투표하면 늘 1위
기자들이 찾고 시인들이 만났으며 학생들이 따랐다. 월간 ‘바둑’의 인기 투표엔 언제나 1위였다. 타이틀을 상실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그는 조훈현 다음 2위에 머물렀다. 그가 세상과 반상의 거리감을 좁히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바둑은 실력의 세계. 제1인자가 추구하는 것은 곧 바둑계 전체가 추구하는 것이 된다. 굳이 소박한 프로이트(S. Freud) 심리학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대통령의 언행은 국민의 의식에 새겨지고 부모의 태도는 자식에 대물림된다. 승부 세계는 그보다 더하다.

김인이 추구하는 그 무엇이 담긴 것. 그것이 60~70년대 한국의 바둑이었다. 그의 중후(重厚)한 기풍은 애기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바둑이란 것은 두터워야 제대로구나!” 중후는 빠름의 대극이다. 애기가들의 안목이 두터움에 쏠리자 사회적으로도 바둑이 두터워졌다. 도시의 소외와 각박함에 대해 바둑이 보상해줄 수 있는 자산이 되었다.

두터운 바둑으로 각박한 시대 힐링
72년 조훈현이 일본에서 돌아오고 냉정한 서봉수가 명인을 따낼 때 실력주의는 밀어닥쳤다. 그 시간을 10년 앞둔 60년대 조남철은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변화하는 세상과 잘 안 맞았다. 그런 한계, 그런 위험. 그런 게 있었다. 만약 실력주의의 풍조가 조남철 시대에 바로 들이닥쳤다면 바둑은 좁아졌을 것이다.

일본과 달리 예의 기운이 한 번도 제대로 피어나지 못한 상태였기에 바둑은 해방 전 노(老)국수 시절의 내기바둑 기운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세우는 게 일이었던 조남철은 68년 한국기원 낙성으로 일을 다했다. 조훈현은 일본을 이기는 게 몫이었고 89년 응씨배 우승으로 절정을 이뤘다. 그 중간에서 김인의 의무는 넓히는 것이었다.

기풍과 이름은 현실의 반영이다. 조훈현은 ‘빠른 창, 부드러운 바람’으로, 서봉수는 ‘잡초 바둑’으로 표현된다. 실력주의 시대의 표상이다. 김인은 ‘청산(靑山)’으로 불렸다. 유장하고 두터운 수법이 중후한 인품을 반영했다. 바둑의 격을 높인 김인은 잊지 못할 인물이었다. 기념이 아니라 잊지 못해 반복되는 존재. 반복되는 것은 의례가 되고 의례는 언제나 새롭게 의미를 던져준다. 소설가 김성동(67)이 알려주었다. 사람들이 그를 ‘영원한 국수’로 부른다 했다. 그가 타이틀을 잃었을 때 비로소 얻게 된 이름이다.



문용직 서강대 영문학과 졸업. 한국기원 전문기사 5단. 1983년 전문기사 입단. 88년 제3기 프로 신왕전에서 우승, 제5기 박카스배에서 준우승했다. 94년 서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바둑의 발견』 『주역의 발견』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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