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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행정관료시스템을 원하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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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조윤제
서강대·경제학

지난 약 반세기 한국의 근대화·산업화 속도는 18세기 이후 서구 선진국의 3~4배 이상으로 빨랐으니 이들이 2, 3세기에 걸쳐 이룬 변화가 한국에서는 반세기에 일어난 것이다. 초고속 성장은 국민의 심한 정서적·정신적 갈등과 가치관의 혼동을 가져왔다. 그 과정에서 국가와 타인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관용과 인내, 절제를 잃게 된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과거 선진국은 산업화 이후 6~7세대에 걸쳐 수차례의 큰 시스템 개혁을 거치며 오늘의 선진사회에 이르게 됐다. 한국 사회는 성장이 빨랐던 만큼 시스템 혁신도 훨씬 더 빨라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근대화 과정에서 선진국이 고심하며 발전시켜온 것 중 하나가 행정관료시스템이다. 행정관료제도의 혁신은 국가가 위기를 맞이하면서 그에 대한 반성과 성찰에서 출발한 경우가 많았다. 국가위기는 국가 리더십의 위기이며 행정관료엘리트는 이의 주요 축을 구성한다. 프랑스혁명 이후 나폴레옹은 국가 고위관료들을 양성하기 위해 그랑제콜을 만들었고 드골은 책임감 있고 능력 있는 국가지도자가 부족해 독일로부터 치욕을 당했다는 반성에서 ‘국가지도자 양성소’로 불리는 국립행정학교(ENA)를 설립했다. 여기 출신들은 행정·기업·정치를 오가며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다. 독일 역시 나치와 같은 정권을 용인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아데나워재단·콘라트재단 등 정당이 중심이 되어 후속세대를 양성하는 아카데미를 세우고 일반 국민 대상의 시민교육에서부터 행정엘리트 배출에 이르는 다양한 활동에 깊이 관여한다. 지난주 ‘박태준 미래전략연구소’가 주관한 포럼에서 고려대 박길성 교수는 행정관료 엘리트의 양성에 대해 선진국의 사례를 연구한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행정관료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국가 발전의 핵심으로 중요하게 인식되어 왔다. 시장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관보다 시장우위의 추세가 강해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어느 나라에서나 정부와 관료의 역할은 막중하다. 개방화·자유화·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지난 한 세기 전 세계적으로 공공영역은 오히려 점점 더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국내총생산(GDP) 대비 약 10%에 불과하던 공공지출의 비중은 지금 많은 선진국에서 40%를 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에도 이 비중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정부예산이 2004년 22.5%에서 2013년 24.4%로 증가했다.

 21세기는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행정관료로 하여금 새로운 식견과 전문성, 소명감을 요구하고 있다. 글로벌 시각, 창의적이며 복합적 문제에 대한 해결 능력을 갖춘 관료를 요청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2014년만큼 한국의 행정관료가 곤혹스러웠던 적도 없었을 것이다. 지난 7월의 한 조사에 의하면 전직을 고려해 봤다는 공무원이 80%에 달했다. ‘관피아’라는 용어는 마피아라는 범죄조직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암적 결탁, 폐쇄적인 집단 결속, 검은 카르텔과 같은 반사회적 행위들의 표현이다(박길성, 상기 논문). 그동안 특정 부처의 행태와 관련해 비슷한 용어가 회자되긴 했지만 행정관료집단 전체가 언론과 정치인, 심지어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에 의해 범죄집단의 용어로 표현된 적은 없었다. 그런 나라가 있었던가.

 훌륭한 지도자와 소명감 있는 국가엘리트를 갖는 것은 국민의 복이다. 그러나 이들을 키워내는 것 또한 국가와 국민의 책임이다. 최근 공무원연금개혁 논의를 보면서 아쉬운 점은 대한민국이 앞으로 어떤 행정관료시스템을 지향해 나갈 것인가 하는 고려는 실종되어 있다는 것이다. 평균수명 60세 시대에 설계, 도입된 제도가 평균수명 80세 시대에 적합할 수는 없다. 적자가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제도는 제도 자체로서 당연히 개편돼야 한다. 그러나 연금도 보상체계의 일부이며 이를 국가행정엘리트들의 양성과 충원, 이들이 국가사회를 위해 기여, 헌신할 수 있도록 하는 보상체계, 인사의 규율과 관행에 대한 큰 그림 없이 단순히 재정적자와 국민의 혈세를 축낸다는 관점에서만 접근되어 왔다. 세계화 시대의 국가 간 경쟁은 국가지배구조, 지도자들의 역량, 관료시스템 간의 경쟁이기도 하다. 행정관료의 전문성이 강화돼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민간과의 교류가 더 활성화돼야 하며 보수체계도 민간 부문과 더 가까워져야 한다.

 지금과 같이 정당의 정책기능이 취약하고, 또 5년 단임제 정부에서 한국의 관료시스템마저 무너지게 되면 국가의 장기적이며 일관된 정책은 누가 지켜나갈 것인가. 공무원의 보수는 어차피 국민의 주머니에서 나가는 것이다. 유능하고 소신 있는 관료시스템을 가질 수 있는 그림이 제시된다면 국민은 지금과 같은 혈세논쟁에만 매여 있지는 않을 것이다.

조윤제 서강대·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