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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왜 큰 그림이 없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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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국제 경영학계에서 꽤 유명한 두 명의 학자가 최근에 한국을 다녀가면서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한국인 김위찬 교수와 미국인 르네 마보안 교수-선진 국가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블루오션 전략'의 공동 집필자인 그들은 영화계의 스타처럼 장소를 옮겨가며 수백 명의 기업인을 몰고 다녔다. 연단과 청중석을 오르내리면서 쏟아내는 두 교수의 열정이 강연장 분위기를 오히려 긴장상태로 몰아갔다. 경쟁자가 없는 새로운 시장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또는 어떤 것이 가치 창조인가 등 아무리 생각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 블루오션의 정체를 궁금하게 여겨온 청중을 사로잡았다.

▶ 최철주 월간 NEXT 편집위원장

김 교수는 기업과 정부의 구조조정과 관련한 블루오션 전략을 설명하면서 이런 실례를 들었다. 척추 통증 환자가 처음 만난 한 외과의사는 간단없이 수술을 권유했고, 다른 병원의 두 번째 의사도 똑같은 진단을 내렸다. 그러나 세 번째 의사는 달랐다. 이 환자를 멀리 세워놓고 걷는 모습을 관찰하면서 이상현상을 발견했다. 정밀진단 결과 환자의 한쪽 발이 다른 쪽보다 약간 짧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 환자의 짧은 발에 맞는 구두를 만들어 주었으며 몇 개월 지나 척추 통증이 사라졌다. 김 교수는 이 환자의 치료 방법처럼 전략은 전체를 보는 훈련에서 시작돼야 하고 새로운 대응방안을 마련하는 '큰 그림'을 그릴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느 한 부분만을 보고 칼을 드는 기업인은 경영을 통째로 파탄시킨다는 것이다.

김 교수의 '큰 그림' 이야기는 러플린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장이 지난해 어느 모임에서 이야기한 것과 비슷한 개념이다. 사회와 과학 등 모든 분야가 깊이 연결되고 각 부분이 상호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전체를 볼 줄 알아야 기업 조직이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모네나 르누아르의 유명한 그림도 아주 가까이서 마주 서게 되면 작은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며 그런 식의 작품 감상은 의미 없는 일이다. 부분의 법칙에만 매달리면 대화가 잘 안 돼 모든 게 엉기게 된다는 그의 주장이 오늘의 문제들에 골치를 앓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었던 것이다.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로 우리나라가 세계적 찬사에 휩싸여 있는 것은 사실이나 모두가 지나친 환상과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을 경계하는 목소리에 유념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생명과학도 기실 그 내면을 펼쳐들면 역시 전체를 보는 통합적 시각이 주목받지 못해 연구가 오히려 위기를 맞고 있다는 주장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과 시각이 한쪽으로만 휩쓸려 가는 한국적 특이현상 때문에 다른 부분이 아주 매몰되다시피 한 것이다. 서울대 의대 엄융의 교수가 최근에 발표한 '미로에 갇힌 생명과학-피지옴이 돌파구다'에 관한 보고서도 이 같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인체 기능을 거시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새로운 정보의 데이터 베이스(DB)화를 게을리함으로써 앞으로 예상되는 놀랄 만한 연구 진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한다. 인체 기능을 조절하는 20만 개 정도의 단백질 중 기껏 1~2개를 찾아냈다고 해서 생체기능이 밝혀지고 치료제가 개발된 것처럼 잘못 알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다. 컴퓨터와 DB 기술을 이용해 생체 정보를 정량화하고 수학.물리학.전자공학.생물학.기초의학.임상의학 등을 동원하면 생명윤리에 저촉될 걱정도 없으며 생명과학 분야는 엄청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여기에서 예를 든 전문가들은 경제.경영.교육.과학 분야에서 20~40년 이상을 현장에서 뛴 사람들이다. 그들은 비합리와 혼돈, 경쟁과 갈등, 마찰이 범벅이 된 현실이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현대인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3년 전 미국의 심리학자 카네만 교수가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것처럼 학문 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분야 간의 교류는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나무와 숲을 보고, 숲을 더 관찰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글로벌 시각을 갖지 못한 미시분야 박사들이 각국에서 푸대접받는 이유를 거기서 찾아야 한다.

최철주 월간 NEXT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