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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이란사태 텔터 특공작전(2)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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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80년 3월22일. 이란관리들과의 인질석방 교섭이 모두 허사로 돌아간 후 나는 군부 지도자들로부터 특공대를 투입하는 새로운 구출작전 계획을 브리핑 받았다. 이 계획은 인질사건 초기에 작성됐던 것보다는 훨씬 구체적이었으나 아직도 보충할 점이 많았다.
미국의 특공대가 내릴 수 있는 이란 안의 착륙지점 중의 하나는 테헤란 남쪽 2백마일 밖에 있는 외딴 사막지대였다. 첩보위성이 촬영한 사진을 검토해본 결과 그 지점은 지형이 순탄해서 야간에도 특공대를 실은 수송기가 착륙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얼마나 지형이 순탄하고 지질이 단단한가를 알아보도록 소형 정찰기를 보내 사막을 직접 육안으로 관찰하게 했다.
이 정찰비행은 날씨가 좋고 달빛이 밝은 날을 택해서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내가 구출작전을 감행하라는 최종 단안을 내리지는 않았으나 특공작전의 계획 및 훈련은 계속해 하도록 했다.
주말인 3월24일, 「샤」는 파나마에서 이집트로 거처를 옮겼다. 미국과 파나마의 신문들은 「샤」가 거처를 바꾼 것은 「키신저」와 「록펠러」의 탓이라고 비난했다. 누구의 책임이든 나는 「샤」가 파나마를 떠나는데 강력히 반대했다. 왜냐하면 이일로 해서 「사다트」가 큰 곤란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외딴 사막지대 선정>
그러나 「샤」는 그런 일엔 아랑곳없이 파나마에 머물게 되면 자신의 신변이 위험하다고 그릇된 주장 만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이란측은 「샤」가 이란 땅에 보다 가까이 오게 되었으며 파나마로부터 송환될 가능성(물론 이란 측의 환상에 지나지 않았지만)마저 물거품으로 만들었다고 우리를 비난하고 나섰다. 그들은 다시 인질들을 재판에 돌려 처벌하겠다고 위협했고 혁명위원회는 마질리스(이란 의회)선거를 무기한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인질의 석방가능성은 더욱 멀어졌다.
나는 이란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킬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우리는 우방들로 하여금 테헤란에 대해 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 주도록 요청하는 한편 「바니-사드르」에게는 4월l일까지 인질을 석방하지 않으면 미국은 이란의 항구봉쇄를 포함해 엄중한 대응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나는 또 우리의 인내가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는 점을 영국·프랑스· 서독 및 각국지도자들에게 알렸다.
처음으로 나는 우방들이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미국을 진심으로 도와주고 있다고 느꼈다.
4월2일 미국의 소형정찰기 1대가 초 저공으로 이란영토 수백 마일 깊숙이 비행한 끝에 특공대원들의 착륙 예정지인 모래사막에 내려 그곳 지형을 샅샅이 살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 정찰기는 아무에게도 탐지되지 않고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기지로 귀환했다.
정찰기 조종사는 그곳 사막의 지형이 편편하고 단단했으며, 또 외딴 지역이라서 비행기가 착륙하기에는 아주 이상적인 장소라고 보고했다. 그는 다만 그 사막 근처에 거의 사용되지 않는 조그마한 시골길이 하나있을 뿐이라고 했다.

<군사작전 다각토의>
나는 보좌관들과 의논 끝에 특공대를 투입하는 구출작전계획을 완성시키라고 명령했다. 작전에 필요한 장비를 미리 확보하고 이란에 투입될 특공대의 출동준비를 갖춰 놓기 위해서 였다.
4월3일, 과격파들과의 회담을 끝낸 2명의 이란혁명위원들은 인질을 4월5일(토요일)까지 이란정부로 넘기라는 요청을 과격파들이 수락하게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어 「바니-사드르」도 인질들이 이송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혁명위원회가 「호메이니」의 승인 없이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4월4일 금요일, 나쁜 뉴스밖에 없었다.
-「부르게」「비알론」 및 「에리크·랭」스위스대사 등을 통해 하루종일 이란측과 교신을 주고받았다. 혁명위원회가 인질의 이송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나 곧 이어 만강일치가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바니-사드르」는 이 문제를 「호메이니」에게 보고했고 「호메이니」는 결국 인질들을 이송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일기 1980년 4월4일>
이란혁명위원회가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났다.
선거로 뽑힌 이란지도자들과 더불어 우리가 끈질긴 노력을 기울였지만 인질석방의 가능성은 사라진 셈이다.
나는 이란에 대해 추가제재조치를 취하기로 결심했다. 미-이란간의 외교관계단절 및 이란외교관의 추방, 식품 및 의약품을 제외한 모든 물품의 대이란 선적금지, 이란에 대한 재정청구액 조사 등을 단행하기로 했다.
우리는 동맹국들에도 우리의 이런 조치에 동조해 주도록 요청했다. 「밴스」는 20개국 이상의 워싱턴주재 대사들을 만나 미국입장을 설명하고 그들의 협조를 부탁했다. 나는 고위 보좌관들을 불러 여러 군사작전을 토의했다.
다음날 미국무성의 「헨리·프렉트」이란과장이 워싱턴주재 이란대사를 불러 미국 안의 모든 이란외교관들은 즉각 미국을 떠나야한다고 통고했다. 이란대사는 화를 내며 인질들은 모두 이란정부의 완전한 보호아래 있다고 항의했다. 「프렉트」는 인질사태가 발생한 첫날부터 인질문제 전담반을 맡아 사건의 자초지종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란대사를 똑바로 노려보고선 『허튼 소리는 집어치워!』(Bullshit) 라고 쏘아붙였다.
폭언을 듣고 난 이란대사는 슬그머니 국무성건물을 빠져나가 미국기자들에게 「프렉트」과장으로부터 모욕적인 대접을 받았노라고 털어놓았다.

<헨리, 이란대사 면박>
-나는 「헨리」(주「프렉트」과장)에게 메모를 보내 훌륭한 외교용어란 압축되고, 정확하고, 또 명료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그가 이란대사에게 한 대답은 이런 외교기량을 완전히 터득하고 있음을 입증한 것이라고 격려했다. <일기 1980년 4월8일>
이때 또 다른 심각한 사태가 발생했다.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겠다고 위협했다. 우리는 이라크의 의도를 사전에 알지도 못했고 이라크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처지도 아니었으나 이란은 이것마저 미국의 책임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이란의 테러분자들은 만일 미국의 꼭두각시인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할 경우 모든 미국인질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하기 시작했다. <일기 1980년4월10일>
더 이상 외교적 해결을 시도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행동을 취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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