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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 65세 일본, 호봉제 버리자 구조조정 줄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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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울의 같은 대학을 나온 김모(29)씨와 이모(30)씨. 올해 초 김씨는 대기업에, 이씨는 중소기업에 나란히 취업했다. 그런데 임금은 천양지차다. 김씨의 연봉은 4500만원 선인데 이씨는 2600만원 정도를 받는다. 여기다 매년 임금이 자동으로 오르는 호봉제 때문에 격차는 해가 갈수록 더 벌어진다. 매년 임금인상률이 같아도 오르는 금액이 달라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는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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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호봉제를 고수하고 있는 국가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호봉제를 채택하고 있는 기업은 72%에 달한다. 성과보다는 얼마나 오래 자리를 지키느냐가 임금을 결정한다는 얘기다. 생산성 향상을 기대하기 힘든 구조다. 정년이 60세로 연장되자 기업들이 아우성을 치는 이유다. 임금 관련 세계적 석학인 일본 도시샤(同志社)대 이시다 미쓰오(石田光男) 교수는 “임금체계에 관한 한 한국 기업에서 일본의 1970년대를 본다”며 “이대로 가면 기업뿐 아니라 한국의 사회경제 구조도 큰 위기에 봉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경쟁국과 비교해도 크게 떨어진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연간 2만2484달러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권인 24위다. 아시아 경쟁국과 비교해도 초라하다. 아시아생산성기구(APO)가 지난해 기준으로 따진 시간당 생산성은 한국이 26.5달러로 40달러 안팎인 다른 나라보다 훨씬 떨어진다. 그런데도 실질임금은 가장 많다.

 사정이 이러니 기업은 경영이 어려울 때마다 인력 구조조정 유혹에 빠진다. 정규직 대신 인건비가 싼 비정규직 활용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다. 충남의 한 대기업 임원은 “드라마 ‘미생(未生)’의 장그래처럼 정규직보다 생산성 높은 비정규직이 적지 않다. 그런데 임금을 올려줄 수가 없다. 성과에 따라 임금을 주고 싶어도 정규직의 양보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니 조금만 경기가 나빠져도 비정규직부터 줄이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고 덧붙였다. 이를 타개할 유일한 대안은 연공서열형 임금체계를 직무나 성과에 따른 직무·역할급으로 전환하는 길밖에 없다.

 여성 근로자의 70%가량이 시간제 근로자인 네덜란드나 스웨덴 같은 북유럽 국가가 롤모델이 될 수 있다. 이들 국가에선 근무연수와 상관없이 실적에 따라 임금이 지급된다. 네덜란드 사회과학연구소(SCP) 폴테하이스 수석연구위원은 “파트타임 근로자를 써도 기업 부담은 정규직과 큰 차이가 없다. 임금이 성과에 따라 지급되고 정규직처럼 교육훈련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호봉제가 대세였던 일본도 90년대 초부터 직무·역할급으로 임금체계를 바꿔왔다. 그 결과 중소기업이든 대기업이든 임금은 하는 일에 따라 비슷해졌다. 호봉제를 버리자 구조조정은 오히려 잦아들고 과거의 종신고용 관행마저 되살아나고 있다. 2013년부터 65세로 정년이 연장됐지만 기업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고령 근로자의 임금이 자연스럽게 하향 조정됐기 때문이다.

 인천대 김동배(경영학) 교수는 “성과와 역할, 책임의 정도에 따라 임금이 결정되면서 굳이 특정 연령에 인위적으로 월급을 삭감하는 임금피크제를 쓰지 않아도 고용을 유지하고 총액 임금을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 안전망이 취약한 국내 여건상 해고를 쉽게 하도록 만드는 건 위험하다. 해고되는 순간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어 국가의 복지비용 증가 등 새로운 사회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자칫 노동계의 필사적 저항으로 노동시장 개혁 자체가 좌초할 수도 있다. 해고 요건을 완화하는 것보다는 임금체계를 고치는 게 부작용을 줄일 수 있는 길이란 얘기다. 기업에는 생산성 향상을 통한 지속 가능한 성장을, 근로자에겐 오래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사회적으로는 차별과 갈등을 없앨 수 있는 효과적인 길도 된다.

김기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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