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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문화 속의 개성 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하루가 밤과 낮으로 갈라져 있듯이, 인간의 행동은 「일」과 「놀이」로 대립되어 있읍니다. 「일」은 채찍을 들고 시켜도 잘 하지 않은 타율적인 행동이고, 「놀이」는 담을 쌓아놓고 막아도 누구나 열을 올리게 되는 자율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일하는 것」과 「노는 것」이 그렇게 분명한 구별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읍니다.
한번 현대의 일터인 공장 안을 들여다보십시오.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조용히 움직입니다. 기계가 돌아가는 금속의 소리밖에는 둘려오는 것이 없읍니다. 일하면서 어쩌다 잡담을 하게되면 그것이야말로 「노는 것」이 되어 감독자의 눈총을 받게 됩니다. 정신노동에 속하는 사무실의 분위기도 다를 것이 없읍니다.
그러나 혹인 노예들이라 해도 밭에서 일하던 농부들은 목화를 따면서, 그리고 무거운 수레를 끌면서도 노래를 불렀읍니다.
우리의 옛 조상들도 모를 심을 때는 모 심는 노래를 불렀고 타작을 할 때는 타작의 노래를 불렀지요. 민요의 대부분은 일터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아무리 고되고 지루한 일이라 해도, 옛날에는 그렇게「일」과 「노래」가 공존했던 것입니다. 「노래」는 「놀다」와 같은 언어를 가지고 있는 말이므로 노래하면서 일한다는 것은 곧 「놀면서 일한다」는 뜻이기도 한 것입니다.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은 대립 개념이라기보다는 상보적인 것이었지요.
실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이규경의 말입니다만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조화를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씨를 뿌리고 거두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기후를 잘 알아야 합니다.
철을 놓치지 않기 위해 농부들은 하늘을 쳐다보고 귀를 기울입니다. 피부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 하나에서도 하늘의 뜻을 읽는 것이지요.
동시에 농부들은 땅의 힘을 알아야 합니다. 제 철에 씨를 뿌려도, 때맞추어 비가 내려도 아무리 거름을 주어도 자갈 땅에서는 곡식은 여물지 못할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이 땅을 어머니라고 부른 것처럼 토양은 곡식을 태어나게 하는 거대한 자궁인 것입니다. 그러나 최후로 한 톨의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사람의 힘입니다. 좋은 날씨와 좋은 토양을 고루 갖추어도 사람이 씨를 뿌리지 않으면, 밭을 갈지 않으면, 풀을 뽑아주지 않으면 곡식은 자라지 않습니다.
농경시대의 사람들이 일을 한다는 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세 힘을 협화시키는 거대한 합창이었던 것입니다. 수동적인 일이 아닙니다. 농사를 짓는 것은 마치 신이 우주를 창조하는 것과 닮은 데가 있읍니다. 한 톨의 곡식 속에는 작은 우주가 잠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 사람은 옛날부터 농자를 천하지대본이라고 불렀고, 고대의 인도인들은 우주를 농사일과도 같은 「리라」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리라」라는 말은 창조자의 놀이를 뜻하는 것으로, 창조자에게 있어서는 일하는 것과 노는 것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현대인의 괴로운 하루는 일과 놀이가 극단적인 대립을 이루고 갈라선 데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일터에서 노래가 사라지고 부터 일에 대한 애석과 기쁨은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기계는 확실히 인간의 노동욜 편하게 만들어 주었지만, 그 마음을 기쁘게 해주지는 못하고 있읍니다. 뿐만 아니라 일에서 분리된 「놀이」 역시도 진정한 삶의 기쁨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 많은 오락장과 유흥가가 네온사인을 밝히고 있어도 그 골목길을 지나는 도시인들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높은 공장 굴뚝 밑을 지나는 것과 다를 게 없읍니다. 유흥장은 또 하나의 다른 「공장」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겐 단지 「일하는 공장」과 「노는 공장」(오락장)만이 허락돼 있을 뿐이지요. 카지노에서 룰렛이나 슬로트 머신을 돌리고있는 사람들은 어쩌면 그렇게 공장에서 기계를 만지고 있는 그 광경과 비슷합니까?
다른 것이 있다면 한쪽은 돈을 받고 일하는데 비해 다른 한쪽은 돈을 내고 「일하는」 데 있읍니다.
유목전통이 강한 서양인들은 양에서 털을 뽑아냈고 농경전통이 길은 동양인들은 목화에서 털을 뽑았읍니다. 동물과 식물의 차이는 있어도 그것은 다같이 살아있는 생으로부터 얻어내는 재산들이었지요. 그것들은 자라나는 과정이 있고, 피고 지는 생명의 리듬이 있기에 과정이라는 것과 애정이라는 것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동양이고 서양이고 죽은 무기물에서 합성섬유라는 「털」을 뽑아냅니다. 목장이나 농장에서가 아니라 공장에서 말이지요. 거기에는 이미 생명의 리듬이나 과정이 없기 때문에 노래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놀이」의 요소는 티끌만큼도 찾아 볼 수가 없읍니다.
현대인은 농장까지도 공장으로 만들어가고 있읍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집단농장이라는 것입니다. 획일적인 농사일에는 농사를 짓는 그 기쁨이나 애정이 소멸되어 버리기 때문에 생산성이 저하되고 맙니다. 소련은 전 농토가 집단농장으로 되어있고 1%정도만이 사경지로 되어 있읍니다. 그러나 곡물의 전 생산량의 30%가 이 1%의 사경농에서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농산품은 공산품과는 달리 「애정을 가진 노동」 「놀이를 지닌 작업」에서만 가능하다는 증거입니다.
「일」과 「놀이」를 하나가 되게 하는 것, 그 간격을 좁혀 가는 것, 이것이 현대산업문명에의 새로운 도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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