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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직후 친구권유로 군 입대, 40고개에 다시 학문의 길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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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일제말 사범학교(광주)에 진학했다. 교육기관, 특히 한국인을 위한 교육기관이 적었던 당시 사범학교는 입학경쟁률이 매우 높던 인기 있는 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사범교육을 받는 동안 회의가 싹텄다. 좀더 본격적인 공부를 하고싶었다.
1년만에 그만두고 일본에 건너갔다. 와세다(조도전)대학부설 제 1고등학원(3년제)을 거쳐 와세다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했다.
이제 본격적인 공부를 할 수 있겠다 싶었으나 세월은 그런 기회를 허용하지 않았다.
1학년때인 43년「학도지원병」이란 허울좋은 이름으로 일제의 침략전선에 끌려갔다. 중국전선에 투입돼 화북지구 당산근처에서 복무 중 해방을 맞았다. 일군의 일원으로 일본 장기로 송환됐다가 부산을 거쳐 귀국했을 때는12월 하순.
고향 광주에 내려가 쉬다가 이듬해 정월 서울에 올라와 인촌을 찾았다.
『어려운 때일수록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당부의 말씀이었다.
해방직후 혼란 속에 각계각층이 흔들리고 있었고 여러 방면의 유혹도 있었지만 공부를 계속하기로 했다. 서울대 법문학부에 입학했다. 2월 하순부터 학교에 나가 강의를 들었으나 좌익의 선동 등으로 학교는 공부할 분위기가 되지 못했다. 교수진도 갖춰지지 않아 들을만한 강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때 군(조선경비대)에 미리 들어가 있던 고향친구 임충식(작고·육군대장)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군에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전 문교장관 유기춘 등 몇 명이 의논 끝에 학교가 이런 지경일 바에야 차라리 군에 가는 게 좋다고 입대를 결정했다. 그러나 유기춘은 그 직후 어느 지방대학에 강사로 초빙되는 바람에 빠졌다.
광주에 편성된 4연대에 일단 들어갔다가 육사1기로 6주간의 교육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됐다.
연대장·사단장으로 6.25를 치르고 61년 소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15년 군문(군문)에 있으면서도 「학문」의 본디 길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61년 예편과 함께 40고개에서야 멀고 먼 갈림길을 돌아 다시 옛길로 접어들어 감회속에 강단에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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