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세 루머 왜 … 2인자 안 키우는 스타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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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박관천 경정이 작성했다는 ‘정윤회 동향보고 문건’엔 정씨가 대통령 비서실장 인사까지 좌지우지하는 숨은 실세로 묘사돼 있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

 박근혜 대통령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젓는다. 과거 한나라당 대표 시절부터 주변에 2인자를 안 만드는 박 대통령의 ‘통치 철학’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아무리 가까운 측근이라도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한다 싶으면 곧바로 거리를 둔다. 2009년 김무성 의원이 친이계의 추대를 받아 원내대표를 노리자 “친박엔 좌장이 없다”며 파문(破門)을 선고했던 게 대표적 사례다. 2012년 대선 때 친박계 원로그룹인 ‘7인회’가 박근혜 후보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자 박 후보는 즉각 7인회 멤버들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중 일부 멤버들과는 아직까지도 관계가 서먹한 편이라고 한다. 이럴 정도로 박 대통령이 2인자를 경계하는 건 “10대 시절부터 청와대에서 생활하면서 ‘제왕학’이 몸에 뱄기 때문”(익명을 원한 친박 의원)이란 관측도 있다.

 새누리당의 한 친박계 의원은 4일 “이명박 정부의 이상득·이재오 의원, 노무현 정부의 이광재·안희정씨 등 역대 정부마다 실세그룹이 있었지만 현 정부에선 과거와 같은 실세들은 없다고 봐야 한다”며 “그럼에도 세간에선 자꾸 과거 프레임으로 누가 실세인지를 찾다 보니 엉뚱하게 정윤회씨나 박지만 EG 회장 같은 사람들의 이름이 ‘찌라시’에 오르내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수족(手足)이나 마찬가지인 이재만·정호성·안봉근 비서관 등 청와대 비서진 ‘3인방’의 위상도 부풀려졌다는 게 청와대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인사들의 전언이다. 한 청와대 인사는 “소위 3인방이란 사람들은 주말도 없이 온종일 일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인데 그 세 명이 어울려서 정기적으로 정씨를 만나러 강남의 식당에 갈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또 다른 전직 청와대 인사는 “3인방은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할 위치에 있지 않다. 이들이 사적 권력을 휘두르는 스타일이었으면 박 대통령이 진작에 잘랐지 16년간이나 주변에 놔뒀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3인방의 메시지는 ‘모시는 분’의 의중을 떠받든 것에 불과한데 자꾸 자기들이 실세라고 하니 본인들도 황당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속사정을 알 만한 사람들은 제한돼 있다. 새누리당에서도 박 대통령 측과 별로 왕래가 없었던 친이계 의원들은 이번 사건에 대한 인식이 친박계와 비교해 온도 차가 있다. 친이계 재선 의원은 “박 대통령이 2인자를 안 둔다지만 주요 인사 결과를 보면 숨어있는 실세를 가정하지 않고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 핵심 측근들조차 인사의 배경을 모르는 경우가 많아 루머를 부추긴다. 실제로 현 정부에서 주요 요직에서 서울고 출신들이 승승장구하자 시중엔 서울고 출신인 정윤회씨가 배후에 있다는 얘기가 돌아다녔다. 그러나 정씨가 보인상고 출신인 것으로 밝혀지자 그런 얘기는 들어갔다.

 새누리당의 한 당직자는 “검찰이 조사하면 정윤회 문건 사건의 진상은 곧 드러날 것”이라면서도 “실체도 없는 이번 사건이 이렇게 확대된 것은 박 대통령의 권력운영 스타일에 기인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김정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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