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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새해에는 사지 않으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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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귀의 얇기가 습자지 수준이다. TV 홈쇼핑 채널을 틀면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스마트폰 앱으로 결제정보를 전송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집 안 구석구석 언젠가는 필요할 것 같아 홈쇼핑이나 오픈마켓에서 사들인 생필품·화장품 박스가 쌓여 있다. 모델 몸매에 빙의해 결제해버린 옷들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동네 재활용 의류박스로 향한다.

 지난 토요일 저녁, 밤늦게 커피를 마신 게 화근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 인터넷에 접속해 보니 뭔가 축제 분위기였다. 소문으로만 듣던 그날, 블랙 프라이데이(추수감사절 다음날로 미국 상점들이 대폭 할인판매를 시작한다)였던 것이다.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에 오른 직구 사이트에 들어가니 이미 사람들이 몰려 접속이 잘되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이 사람들 도대체 뭘 사려는 거지? 인터넷에는 나 같은 이들을 위해 블랙 프라이데이에 꼭 사야 할 상품을 쏙쏙 뽑아놓은 블로그가 즐비하다. 아, 그렇게 싼 거란 말이지. 날이 밝을 때까지 열심히 외국 사이트들을 순례했다. 그렇게 건진 신발 한 켤레와 화장품이 지금 바다를 건너오는 중이다.

 올해가 유난하긴 했다. 지난해 블랙 프라이데이 기간 중 4만여 건이었던 한국인의 직구가 올해는 8만여 건에 달했다니 말이다. 한 직구 사이트는 매출이 평소의 10배까지 뛴 곳도 있다. 필요한 물건을 보다 저렴하게 구매하려는 합리적인 소비행위로도 볼 수 있지만 실은 ‘남들이 다 사니까 덩달아 사는’ (나 같은) 이도 많다. 불과 열흘 전에도 비슷한 광경을 봤다. 개정 도서정가제 시행(11월 21일)을 앞두고 책을 사려는 사람이 몰려드는 바람에 온라인 서점 서버가 다운된, 출판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 말이다. 남들이 하는 건 해봐야 한다는 조바심이 읽지도 않을 철학책을 사들이는 것에서 더 나아가 남의 나라 세일에까지 작은 정성을 보태고 말았다.

 반성하는 마음으로 퇴근길 『사지 않는 습관』이란 책을 집어들었다. 저자가 진단한다.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을 자꾸 사들이는 습관은 남을 의식하는 마음과 자신이 정당하게 평가되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에서 비롯된다. 이런 습관을 버리려면 불안과 욕망으로 가득 찬 마음의 디톡스가 필요하다. 맞다. 한편에선 ‘심플하게 살기’가 유행 아닌가. 내년의 목표는 이 유행을 좇아 ‘사지 않기’로 정하기로 한다. 그런데 잠깐,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와 박싱데이(크리스마스 다음 날), 연말 폭탄세일은 어떡하지…. 무슨 걱정인가. 새해는 아직 29일 남았다.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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