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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⑤여성] 43. 영화로 본 여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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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여자란 참 이상해요. 남자에 의해서 잘잘못이 가려져요. ” 가녀린 대사를 남기고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별들의 고향’(상·1974년)의 경아. 수십년 뒤 그 후배들은 남자에 의해 규정되는 삶을 벗어나 ‘정사’(중·1998년)에서처럼 금단의 사랑에 빠져들기도 하고, ‘싱글즈’(하· 2003년)처럼 결혼 대신 사회적 독립과 여성들간의 연대를 선택하기도 했다. <중앙포토>

저는 영화 세상이 만들어낸 여자예요. 여자의 자궁이 아니라 남자들이 들여다보는 카메라가 빚어낸 창조물이죠. 물론 여자들도 공헌을 했어요. 아리따운 여배우의 몸이 자양분이 됐으니까요.
요즘 제 모습이 좀 생기를 띠긴 했죠. ‘바람난 가족’ 틈에 적응하려 애쓰다 집을 벗어나 ‘녹색의자’에 앉아 ‘밀애’적 ‘정사’의 달콤 쌉쌀함까지 맛보며, 세상 좋아졌다고 느꼈죠. 80여 년 전 나혜석 언니가 ‘노라를 놓아주게’라고 절규한 ‘인형의 가(家)’란 시가 떠오르네요.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죠. 한번은 카메라 뒤에서 수군대는 오빠들 이야기를 엿들었는데 “한국영화에선 아직 여자가 영웅이나 전사로 나오면 장사가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때 제가 잠시 도끼눈을 떴더니 흠칫 놀라며 금방 이러는 겁니다. “‘조폭마누라’처럼 남자를 두들겨 패거나, ‘엽기적인 그녀’처럼 술주정을 하고 남자를 장악하는 척만 해도 큰 진보 아니겠느냐”는 겁니다. 이제 여성잔혹사는 더 이상 안 통한다고 하면서요.

잔혹사라니까 제 과거가 실타래처럼 풀려나오네요. 한국영화의 황금기라는 1960년대 저는 주로 한복을 입고 순정녀의 고심담을 써나갔죠. 때론 사랑방 손님을 사랑하면서 타는 냉가슴을, 때론 유부남인걸 속이고 저에게 아이까지 갖게 한 남자를 미워도 다시 한번 사랑하는 분열증을 앓았죠. 그걸 조선 여인네의 겸양지덕으로 찬양할 때는 가슴이 답답해 터질 지경이었죠.

그러다 70년대, 저는 거리로 내팽개쳐지죠. 병든 부모님 약값에, 오빠나 남동생 학비를 벌러 서울로 올라오죠. 그런데 운이 나빠 호스티스가 되는 겁니다. 남자들의 노리개가 되죠. 하지만 저는 정조 관념이 영혼 깊이 새겨진 순애보주의자로 설정된지라 늘 자아분열에 시달립니다.

‘별들의 고향’의 순진무구한 경아가 되어 화가 선생님과 사랑을 나누며 어릿광대 놀이도 해 보지만 결국 수면제를 먹고 눈 속에서 죽어갑니다. 세상에선 영상미학이라고 찬양했죠. 그러나 늘 속거나 버림받거나 죽거나 하는 제가 제 정신으로 그걸 즐길 순 없죠.

눈 속에 죽은 저는 다음 해 ‘겨울여자’이화로 부활합니다. 뜻대로 살아볼 방도가 없기에 저는 계속 겨울나라에서만 삽니다. 춥다 보니 남자들의 따뜻한 품이 그립고, 줄창 안기다 보니 호스티스물이라는 장르에서 5년여 살게 해 주더군요. 꽃순이로, 아파트의 O양으로, 색깔 있는 여자로 살았죠. 그렇게 세상의 쓴맛을 봐도, 맘 깊이 새겨진 정조관과 순애보 정신이 저를 괴롭혀 비록 포스터에선 야하게 다리 벌리고 앉았지만 속은 썩어들어 갔답니다. 그래서 저를 ‘가시를 삼킨 장미’라고 불렀나 봐요. 그나마 ‘영자의 전성시대’라는 반어적 제목으로, 제가 갈수록 추락하는 이유를 대한민국 산업화 속에 들이 민게 궁색한 수확이죠.

80년대 광주로, 민주화 데모로 세상이 극적이 되자 영화 세상은 더 강렬한 자극을 제 몸에서 발명하죠. 좀 민망하지만 제게 느닷없이 엑스 라지 사이즈 젖가슴을 붙이는 거 있죠? 저는 ‘애마부인’이 되어 밝히는 여자의 강렬한 성애의 연속극을 연출하죠. 하지만 큰 가슴이 얼굴보다 마음보다 인생보다 중요한 애마들도 역시 일부종사 정조론에 걸려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권선징악의 심판을 받는 겁니다.

도시에서 애마들이 헉헉대는 게 진부해졌는지 잠시 후 저를 뽕밭 같은 대자연으로 불러내더군요. 때론 산딸기로, 때론 앵무새·뻐꾸기·뜸부기가 되어 덤불이나 야산 골짜기에 눕혀 놓더군요.
90년대 봄바람이 영화 세상에도 불어옵니다. 몸 보여주기용 비디오 여자가 내 짐을 덜어줘 큰 가슴 콤플렉스를 벗고, 심지어 전문직을 갖고 공적 영역으로 진출하는 진전을 보이죠.

드디어 해방이다! 라고 밝은 세상에 나와 남자랑 같이 일하고 다투고 섹스하니 일단 시원했죠. ‘그대 안의 블루’에서처럼 여자가 살림하는 습성을 버려야 진짜 독립적인 인간이 된다고 충언하는 남자도 있었지만 내게 청바지를 거꾸로 입혀 놓고 그 도드라진 엉덩이를 섬기는 구질한 남자도 인기를 끌었죠.

‘안개기둥’을 붙잡고 실존적 고뇌를 하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비통해 하다가,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제가 카메라 시선의 주인이 되는 영화 구상도 하고, 다른 ‘싱글즈’ 여자들과 어울려 수다를 떤 ‘처녀들의 저녁식사’는 그런대로 저를 살린 소중한 기억이죠. 그러나 거기 머물 수는 없죠.

저는 세상 속으로 크게 높게 날고 싶어요. 그런 저를 만들어낼 카메라 주인을 기다리지만 이런 수동적 기다림이 문제인 걸 조금 깨달았기에 이제 뷰파인더 밖으로 나갈 길을 모색 중이죠. 노라를 놓아주게, 라는 주문을 외면서요. 제가 온전한 존재로 실체화될 이유와 방법을 같이 찾아가는 당신을 만나기를 기대하면서요.

유지나 영화평론가ㆍ동국대 교수

감독의 말 말 말

***‘별들의 고향’(1974년) 이장호 감독

원작자 최인호와 나 모두 해방둥이다. 박정희 시대의 억압과 통제는 물론이고 도덕과 지성, 혹은 페미니즘이라는 것조차 의식하지 않았다. 경아가 퇴행적이라고? 당연한 비판이다. 그때는 남자에 의해 여자의 운명이 결정되던 시대였다. 지금 경아를 보여주면 눈물이 아니라 웃음이 나겠지. 결말의 비극은 경아라는 자연을 산업화된 도시가 죽인 것이다.

***‘영자의 전성시대’(1975년) 김호선 감독

산업화라는 엄청난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상실감에 도태되고 희생된 사람들을 어쩌면 영자가 대변한 것이다. 조선작의 원작과 다소 달라진 결말에서 영자가 가정을 꾸리는 것은 희망의 메시지랄까. 사실 영자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후의 얘기는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 ‘애마부인’(1982년) 정인엽 감독

외화 수입권을 미끼로 정책홍보영화를 강요하던 시대였다. 여자의 성이라면 호스티스나 매춘녀로나 가능했다. 5공화국도 처음에는 비슷했는데, 어느 날 영화계 인사의 주선으로 권력의 모씨를 만났더니 ‘무검열 통과’를 역설하더라. 그리고 ‘애마부인’이 나왔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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