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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 회고록『신의를 지키며』<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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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미·카터」전 미국대통령의 회고록『신의를 지키며』가 오늘부터 본지에 독점연재 됩니다. 77년1월부터 81년1월까지 백악관의 주인이었던「카터」대통령의 재임4년간은 국제적으로 커다란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난 파란만장의 기간이었습니다. 그의 재임 중에 이뤄진 미·중공국교정상화와 중동평화의 골격을 이룬 캠프데이비드협정 체결과정 등이 이 회고록에 소상하게 기술돼있습니다.
「카터」대통령은 또 등소평의 워싱턴방문 때 그와 나눈 한반도문제에 관한 의견교환과 79년의 10·26사건이후 한국에서 펼쳐진 정치적 변천과정을 놓고 대통령당선자인「레이건」과 벌인 토론내용을 이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 회고록은 미국의 타임지, 일본의 요미우리(독매)신문 등 세계의 권위 지들과 동시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중앙일보는「카터」전 대통령과의 한국어독점계약에 따라 본지의 허가 없이 회고록 내용의 일부 또는 전부를 전재·복사·출판하거나 인용할 수 없음을 밝히는 바입니다.【편집자 주】<무단전재-복사금지>
-중국정책에서 아직 풀지 못한 근본문제는 어떻게 하면 중화인민공화국과 외교관계를 맺는 동시에 대만에 있는 중국인들의 평화로운 생활을 계속 보장할 수 있느냐다. (일기·77년7월30일)
중국에 대한 나의 관심은 1930년대의 어린 시절 중국에서 활동하던 침례교 선교사들에 관해 배우면서, 또 미 해군 통신병으로 중국항구들에 자주 들르던 외삼촌「틈·고디」의 편지를 읽으면서 싹텄다. 휴가로 본국에 돌아온 순회선교사들은 환등기로 그곳 사진을 보여주면서 중국인들은 우리의 친구이며 병원과 먹을 것과 학교와 구세주「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앎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가르쳤다. 당시 우리 침례교인들은 중국에서 일하는 침례교파 선교사들이 다른 어느 나라의 포교전선에 나가있는 사람들보다도 뛰어나고 고결한 엘리트라고 여겼었다.
그러나「톰」외삼촌이 중국의 물에 올라 보내준 사진과 설명들은 선교사들 것과는 전혀 달랐다. 부둣가 상점 앞의 거리 모습, 상해·청도의 술집 풍경-. 나는 선교사들이 이런 곳엔 전혀 가보지 못했거니 생각했다.

<어릴 때 꿈꾸던 중국>
이 두개의 시각은 똑같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5센트, 10센트 짜리 잔돈들을 모아 해외선교사들이 여는 모임에 쫓아다녔고 외삼촌과 부지런히 편지 왕래를 했다.
훗날 해군의 잠수함장교가 된 나는 소년시절 얘기로만 들었던 몇 몇 군데를 직접 가볼 수 있었다. 49년 초 내가 탄 함정은 미국과 영국해군이 중국근해에서 벌인 합동훈련에 참가해 홍콩에서 청도까지 항해하면서 여러 항구에 하루 이틀씩 머물렀다. 우리가 들른 항구들은 아직은 국민당 군이 점령 중이었으나 모두 모택동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어느 곳에서든 저쪽 능선 위엔 공산군의 야영 모닥불 빛이 보였다. 거리의 상점창문들은 거의 다 널빤지로 막혀져 있었지만, 나와 동료들은 어둠침침한 가게에 들어가 생사나 가축제품, 상아와 목각 공예품 등을 싸게 사들이곤 했다.
청도의 거리에선 어린 소년과 노인들을 총검으로 위협하며 입대시키는 광경도 보았다. 국민당통치의 끝장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우리는 4월에 중국을 떠나 진주항 기지로 돌아갔다. 그리고 반년이 채 못 돼 장개석과 추종자들은 본토에서 밀려났다. 그들은 국민당 정부를 대만 섬으로 옮겼고, 미국은 계속 이 정부를 중국유일의 합법정부로 인정했다. 한국전쟁중 대만은 미군의 주둔기지였으며 54년12월엔 미국과 국민당 정부사이에 상호방위조약이 맺어졌다.
이처럼 미국은 장개석 정부 편을 충실히 들었지만, 세월이 흐르며 장이 대륙을 모택동으로부터「해방」시킬 가망이 없다는 사실은 대만의 우방들에도 차츰 뚜렷해졌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세계인구의 4분의l 가까운 10억의 국민을 안고있으며 그 영속성과 국제정치에서의 전략적 중요성은 명백했다. 미국도 언제까지나 현실에 눈감을 수는 없었다.
70년대 초가 되자 중공자신도 미국과의 관계결핍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동맹국이었던 소련과의 사이는 이미 악화돼 69년엔 국경에서 무력충돌까지 일어났었다.
고립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은 중공은 미국에 관계개선의 뜻을 비쳤다. 그 결과가 72년에 있었던 「닉슨」대통령의 중공방문이며,「단 하나의 중국」을 인정한「닉슨」-주은래의 상해공동성명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미국은 일단 본토정부와 완전한 국교가 맺어졌을 때 대만과는 외교관계를 지속할 수 없을 것임을 넌지시 밝혔다.
상해공동성명은 또 대만주둔 미군은 긴장완화에 맞춰 감축될 수 있으며 두 중국사이의 분쟁이 해소됐을 때는 아주 철수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것은 커다란 외교적 업적이었다. 당시 나는 이 성과가 서 태평양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또 미·중공관계가 곧 꽃을 피워 전면국교수립으로 열매맺기를 기대했다. 73년 북경과 워싱턴에 두 나라의 연락사무소가 설치된 것은 이 같은 목표로 한 발짝 다가서는 조치였다.
그러나 처음의 흥분이 가라앉은 후 국교재개를 향한 발걸음은 멈춰졌다.
미국내, 특히 의회에서 대만의 영향력은 매우 셌다. 당시 정치적 소용들이 속에서 대통령의 꿋꿋한 지도력이 없는 것을 틈타 대만 로비스트들은 이 중요한 극동문제에 대한 미국정책을 마음대로 요리하는 듯 했다. 76년 예비선거에서 몇 번의 승리를 거둔 후 나는 이들이 얼마나 유능하게 움직이는가를 직접 겪을 수 있었다.
고향 플레인즈 일대에 사는 내 친척과 이웃들한테 대만수도 대북으로 공짜 휴가여행을 시켜주겠다는 초청이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이 아첨 수에 넘어간 사람들에게 대만지도자들은 술과 음식을 푸짐히 대접하고 멋진 선물까지 안긴 후 중공에 대한 미국의 약속이행 같은 건 잊어버리도록 나를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
나는 직계가족들이 이런 난처한 대접을 받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부 고향친구들은 내가 여행이나 향응을 반대하는 걸 고깝게 여기는 바람에 교우관계가 위협받기도 했다.
중공과의 관계개선은 대만의 안전에 대한 미국의 공약을 저버리거나 소련과의 이미 긴장된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지 않고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미국의 국제관계 중엔 근시안적이며 비생산적인 미·소 대결 심리란 고질병에 뿌리박은 게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당시 양면으로 막다른 골목에 놓여있었다. 북경정부를 중국유일의 정부로 인정하려는 시도와 소련과 전략무기제한회담(SALT)을 마무리 지으려는 노력이 모두 교착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대북 공짜 여행 선심>
나는 이런 상황욜 되도록 빨리 바꿔놓고 싶었다. 76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직후 나는「헨리·키신저」국무장관에게 내 고향 플레인즈로 와 현안문제들을 설명해달라고 요청했다. 특히 중국인들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싶었기에「키신저」가 중공을 여러 번 드나들면서 받은 인상들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키신저」는 중국인들이 빈틈없고 끈질긴 협상상대이고, 참을성이 많으며, 미국내 정치상황이 아직은 중공과의 과제정상화 움직임을 허용치 않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중공최고지도자들과의 교섭이 유쾌한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나는 그들이 믿을만하냐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협정의 어구와 정신을 모두 정확하게 이행할 겁니다. 』「키신저」의 대답이었다. 그는 이어 소련인들은 이와 달리 협약의 문구는 지키겠지만, 어떻게든 빈틈을 찾아내 협정의 본뜻을 어기더라도 자기 쪽에 유리하게 이용하러 들기 때문에 언제나 조심해야한다고 덧붙였다.
백악관에 자리잡은 후 나는「닉슨」과「키신저」가 중공지도자들과 나눈 대화의 자세한 메모와「포드」전 대통령이 중국인들에게 사적으로 한 말 등을 차근차근 검토했다. 기록은 길었지만 매우 흥미로왔다. 나는 근5년 전 어떤 것이 이뤄졌으며 앞으로 해야할 일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를 보다 뚜렷이 이해할 수 있었다.
「키신저」가 북경을 처음 방문한 그 시점부터 미국과 중공사이에 해결돼야할 가장 큰 쟁점은 미-대만관계였다. 중공지도자들의 미묘하고 은근한 말투 때문에 이 문제는 회피되는 듯한 인상도 때로 주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한데 이 지극히 민감한 정치적 문제가 미국국민들 앞에 솔직히 공개되고 토론에 붙여진 적은 전혀 없었다.
77년2월초, 중공지도자들의 태도를 보다 잘 알아보기 위해 나는 당시 워싱턴 주재 중공연락시무소장 황진을 백악관 집무실로 초청했다. 우리는 폭넓게 얘기를 나눴는데, 그는 어떤 주제가 나오든 꼭 소련의「영향력」이나「역할」을 강조했다. 소련을 들먹일 때마다 그는 적의와 불신감을 드러냈고, 소련지도자들이 진실로 평화유지와 핵무기 통제를 바랄지도 모른다는 내 말을 반박했다.
그는 핵무기에 관한 중공의 정책은 내가 선거운동 때와 취임식 연설에서 내세운 것, 즉 핵무기 양을 즉각 줄이고 궁극적으로 모든 나라의 핵무기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자는 주장과 똑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미국이 서 태평양지역에서 계속 강력한 군사적 존재로 남아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일본의 군사력이 다시 강화될 가능성에 우려를 나타냈다 (일본에 관한 중공의 입장은 뒷날 바뀐다. 미·중공관계가 진전됨에 따라 일본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은 차츰 줄어, 드디어는 일본에 군사력 증강을 권하게까지 됐다) .

<키신저에 자문 구하고>
황은 중공의 인내심을 강조하면서도 미국 쪽이「몇 년 전 맺은 협정을 실천에 옮길」준비가 되기만 한다면 중공은 기꺼이 관계정상화에 나설 것임을 뚜렷이 했다. 나는 그 동안 많은 미 정부관리들이 거듭 북경을 찾았으니 만큼 이젠 중공의 고위 인사가 워싱턴을 방문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황은 이 제의를 거절했다.
『워싱턴에 대만대사가 있는 한 그건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중국인 특유의 참을성 있고 고집스러운 태도였다. 중국인들은 별달리 으스대지는 않으면서도 언제나 자신들의 나라가 아직도 이름 그대로「세상 한가운데의 왕국」, 즉 문명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양 행동한다. 그래서 그들은「원칙적 문제들」에 관해 선 티격태격할 것도 없이 남들이 중국의 주장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려든다. 아무튼 황진과의 대화에서 한가지는 뚜렷해졌다. 미국과 중공은 곧 관계정상화로 나아갈 준비를 갖추리라는 점이었다.
통역을 사이에 두고 얘기하는 바람에 회담은 예정시간을 넘겼다. 이건 뒤에 우리 해외공관들을 통해 들려온 얘기지만, 당시 중공 쪽에선 내가 황과 만난 시간이 그 얼마 전 소련대사와 함께 한 시간보다 길었다는데 적지 않은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나로선 이들과 만날 때 시간의 길이 같은 건 전혀 생각지 않았었다.
취임직후 몇 달 동안 다른 할 일들도 많았지만 중국문제는 줄곧 관심을 두고 거론했다.
한편 북경주재 연락사무소장으론 전 국자동차노조위원장직에서 갓 은퇴한「레너드·우드코크」를 임명했다.「우드코크」는 내가 개인적으로도 존경하는 인물로, 과묵하지만 힘있으며, 연령이나 경험·태도 등 어느 면에서도 중공지도자들과의 교섭에 적합한 사람이었다. 또 내가 미국사회에서 그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골라 보낸다는 것 자체가 중공과 보다 가까워지기를 바란다는 명백한 신호이기도 했다.
-「레너드·우드코크」가「사이러스·밴스」랑 다른 사람들과 함께와 중공과의 관계정상화 문제를 얘기했다.「우드코크」는 한 주일쯤 있다 북경으로 떠난다. 나는 그에게 두 나라의 정상적 관계가 바람직하며, 미국 국민에게도 이 같은 점을 이해시킬 수 있으리라고 믿고, 그 정치적 책임은 내가 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남은 단 하나의 장애는 대만에 사는 중국인들의 평화로운 생존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한 우리의 공약이다. (일기· 77년7월7일)
대만사람들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나는 국무장관「밴스」로 하여금 워싱턴주재 대만대사를 만나 극동문제에 관한 견해를 듣도록 했다. 예상대로 대만대사는 현상유지를 주장했다.
8월17일「밴스」는 나와「즈비그네프·브레진스키」안보담당 보좌관이 있는 캠프데이비드로 왔다. 우리는 중공에 어떤 제안을 내놓을 것인가를 협의했다. 「밴스」는「우드코크」가 북경연락사무소에 자리잡는 대로 곧 뒤따라갈 계획이었다. 우리는 자그마한 탁자주위에 둘러앉아「밴스」가 중공 측과 논의하게될지도 모를 협정의 초안을 한 자 한 자 검토했다.

<등·화에 새로운 기대>
나는 예전기록의 검토 및 황진과의 대화 등을 통해 중공이 이것만은 협상하지 않겠다는「3원칙」이란 게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 3원칙이란 미·대만방위조약의 폐기, 대만대신 북경정부와의 외교관계 수립, 주 대만미군철수 등이었다.
나는 이런 원칙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었다. 단, 명예롭고 질서 있는 방법으로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미국은 첫째 대만에 방위용 무기를 계속 팔 수 있어야하며, 둘째 비공식적으로 대만과 무역 및 기타관계를 유지하고, 셋째 상호방위조약은 조문에 명기된 대로 l년간의 예고기간을 둔 후 폐기하며, 넷째 중국본토와 대만사이의 분쟁이 평화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북경정부의 이론 제기 없이 공개적으로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중공으로 하여금 대만과의 비공식 관계에 대한 우리의 요구와 대만의 평화적 존립에 관한 우리의 항구적 관심을 받아들이게 하느냐다. 중공이 협력할 마음만 먹는다면 길은 여러 가지 있었다. 이를테면「미·대만무역관계」에 대해선 침묵을 지키면 그만이고, 「중공·대만분쟁의 평화적 해결」부문은 같은 말을 해석만 다르게 해버리면 된다. 또「대 대만방위용 무기판매」같은 문제는 미·중공양국간에 해소되지 않는 견해차가 있음을 인정하되 이것이 관계정상화를 저해하지 않게끔 만 하면 될 것이었다.
나는 교섭을 서서히 추진하기로 했다. 제안을 한꺼번에 내놓을 게 아니라 부분 부분을 차례로 중공 측에 제시해 단계적으로 해결할 방침이었다. 지루하고 시간이 걸리는 방법이지만, 여러 가지 견해차를 한꺼번에 다루려다 협상이 완전히 교착될 가능성을 최소한으로 줄이는데는 이 방식이 제일이었다. 또 협상당사자들끼리도 서로 잘 알게돼 상대방의 의도를 보다 정확히 짚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협상이 잘 풀리면 77년 말쯤 협정을 발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안되더라도 끈기 있게 기다릴 작정이었다.
「밴스」국무장관은77년8월22일부터 북경에서 탐색협의를 시작했다. 그를 맞은 북경지도자들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신중했다. 76년 모택동과 주은래가 모두 사망한 후 새로 들어선 지도자들은 국내적으로 해결해야할 정치·경제 문제들을 많이 안고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나와 내 정책에 대해서도 아직 잘 몰랐으니 만큼 중요한 문제에서 우리를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 알아내는데는 몇 달은 더 필요할 듯 했다.
-중공에서「밴스」가 보낸 보고내용은 조금은 고무적이다.
등소평 부주석과 만났으며 내일은 화국봉 수상과 만날 예정이라고 한다.
대만과의 관계를 남겨놓은 우리의 정상화제안을 그들이 받아들일지는 두고보아야 할 것이다. (일기·77년8월24일)
「밴스」장관과 중공지도자들의 만남은 우호적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지만 중공이 아직은 우리 뜻대로 움직여 줄 태세가 돼있지 않다는 사실은 이 예비탐색이 끝났을 때쯤 뚜렷해졌다.
게다가 우리 쪽의 관리 한사람이 중국인들이「예상 밖의 융통성」을 보여주었다고, 사실과도 다른 내용을 잘못 흘리는 바람에, 「밴스」의 방문이 끝났을 때 등소평이 기자들에게 발표한 성명은 적지 않이 신랄했다. 「원칙」에 관해 융통성을 보인다는 비난만큼 중국인들이 꺼리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대 소 전략에도 대립>
아무튼 우리는 국내에서도 이 문제는 당분간 보류하기로 했다. 나는 이때 큰 쟁점이 되고있던 파나마운하양도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중국 정책을 공개 거론하고 싶지 않았다. 당시「배리·끌드워터」상원의원 등 이른바「대만로비」의 몇몇 의원들은 파나마운하조약에 대해 뚜렷한 태도를 정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판국에 대만을 멀리하는 정책을 들고 나오면 이들은 파나마문제에서 정부의 반대표로 돌아설게 틀림없었다.
북경에선「우드코크」 연락사무소장이 간접적인 방법으로 중공지도자들에게 우리가 관계개선추진을 바란다는 신호를 꾸준히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긍정적 응답도 받지 못했다.
중공의 최고지도자들은 워싱턴에 대만대사가 있는 한 자신들은 미국을 방문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각료 급 관리 몇을 보내 양국무역과 중공의 미국기술도입 가능성 등 여러 문제를 협의토록 하는데는 꽤 열의를 보였다.
그런데 이 관리들은 한결같이 미국의 방위태세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면서 우리가 잠재적국들을 너무나 약하게 대한다고 비난했다. 그들이 말하는 잠재적국이 소련이란 것은 빤했다.
이같이 판에 박은 정치선전논조가 부분적으로나마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경우가 한번 있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2차대전후 미국의 군사전략은 대서양과 태평양지역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하면서 다른 어느 한곳에서 제한된 소규모 충돌까지도 치러낼 수 있는 전력을 갖는다는 바탕위에 세워졌다. 이것이 이른바 「2·5전쟁 전략」이다.
이 전략은「닉슨」과「포드」행정부 때 와서 하나의 큰 전쟁과 하나의 작은 전쟁을 동시에 치른다는 「1·5전쟁 전략」으로 바뀌었다.
한데 중공은 미국의 국방력이 언제나 최고 수준으로 유지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우리 군사력이 감축되는 낌새만 보이면 곧 비판하곤 했다.
-「해럴드·브라운」(주·당시 국방장관) 이 중공의 황진과 만났다고 보고했다. 황은 우리의 군사태세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특히 우리가 근년 들어 전략계획의 내용을「2· 5전쟁」능력에서 「1· 5전쟁」능력으로 바꾼 것을 못마땅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브라운」이 예전의 전략은 중공을 전쟁상대로 하고 짜여진 것이었음을 지적하자 황의 비판은 쑥 들어가 버렸다.(일기·77년11월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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