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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카에다의 레토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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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알카에다의 레토릭은 상당히 강렬하다. 4일 알자지라에 방송된 알카에다 2인자 아이만 알자와히리의 선동은 이런 식이다.

▶ 오병상 국제뉴스팀장

"오! 십자군들이여, 무슬림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라고 권고하였거늘…이슬람의 사자(獅子)인 오사마 빈 라덴, 신이시여 그를 보호하소서, 그는 너희에게 이슬람의 집에서 당장 떠나는 조건의 휴전을 제안했었다. 그러나 너희는 어리석게도 우리 땅에서 물러나지 않고 대신 피를 강물처럼 흘렸다. 그래서 우리는 너희 땅에서 용암과 같은 분노를 촉발한 것이다."

비디오 테이프는 런던 7.7 연쇄폭탄 테러 직후에 만들어졌다. 이슬람 땅에서 떠나라고 경고했는데도 떠나지 않았기에 피의 보복을 했다는 설명이다. 7.7 테러가 자신들의 직접 소행이라는 주장은 없다. 그러나 자신들이 7.7 테러리스트들의 지하드(성전)를 이끌고 있다는 과시는 분명히 한 셈이다. 오사마 빈 라덴은 '이슬람의 용기'를 상징하는 사자로 불리며, 그의 이름을 말하고 나서는 곧바로 '신이시여 그를 보호하소서'라는 축복이 뒤따른다. 거의 성인급 반열이다. 미국.영국 등 이라크 참전국을 '십자군들'이라 부른 대목도 주목할 역사 인식이다. 알카에다는 현 상황을 중세 십자군 전쟁의 연장으로 간주한다.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 땅을 침범했기에 이를 내쫓는 지하드는 무슬림의 의무다. 천 년을 이어져 온 종교전쟁이다.

"우리의 의지는 유리알처럼 투명하다. 너희의 구원은 오직 우리 땅에서 물러남으로써 가능하다. 더 이상 우리 땅의 석유를 도둑질하지 말아야 한다. 이슬람 지역 내 부패한 정권을 지원해도 안 된다."

구원은 이슬람이나 기독교나 거의 같이 쓰는 최상.최종의 기원이다. 알카에다는 바로 그 구원의 3대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첫째는 이슬람 땅에서 떠나라. 가장 중시되는 이슬람 땅은 사우디아라비아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두 성지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메카와 메디나다. 오사마 빈 라덴이 '십자군과의 전쟁'을 선언한 직접적인 배경도 미군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둔이다. 미군은 1990년 1차 걸프전 때부터 사우디에 주둔해왔다. 둘째로 석유 도둑질을 중단하라는 요구는 일종의 민족주의다. 셋째로, 부패한 정권은 중동의 친미 정부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대표적이다. 부패한 왕족들이 선량한 무슬림 국민을 억압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슬람의 평등주의다. 꼭 알자와히리의 협박 때문은 아니지만 어쨌든 미국은 8~9일 이틀간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영사관 문을 닫았다.

"오! 어리석은 미국인들이여. 뉴욕과 워싱턴에서 너희들이 목도한 참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잃은 희생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너희가 무슬림에 대한 공격을 계속할 경우 신의 의지에 따라 가공할 공포에 직면할 것이다. 그 공포는 너희가 베트남에서 경험했던 참상을 무색하게 할 것이다. 미국인들이여! 부시.라이스.럼즈펠드는 베트남 전쟁 때처럼 거짓말을 하고 있다. 너희들이 오늘 물러나지 않더라도 어차피 내일은 물러나게 마련이다. 하루 늦게 물러나는 대가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을 뿐이다."

먼저 뉴욕과 워싱턴의 참변(9.11 테러)을 상기시켰다. 이어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늘어나는 희생자를 언급한 다음 "이제 시작"이라고 공갈쳤다. 그리고 알라의 이름을 빌려 '가공할 공포'를 예고했다. 이라크 무장세력의 저항에 미군의 발목이 잡히는 양상을 베트남 악몽에 빗댔다.

알카에다 조직은 9.11 이후 두 차례 전쟁과 파키스탄 정부의 대규모 토벌로 사실상 형해화됐다. 그럼에도 알카에다는 여전히 무슬림 테러리스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알카에다이즘(al-Qaedaism)이란 이데올로기다. 문명의 충돌, 종교의 충돌, 이데올로기의 충돌…어느 것이든 당장 총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닌 듯하다.

오병상 국제뉴스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