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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512》<제78화> YWCA 60년 (68)비좁은 캠프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유한양행 사장 유일한씨가 기증한 누사의 야산 3만9천8백평에 뉴욕의 사업가「베어드」씨의 기부금이 주축이 되어 건립된 본관은 연건평 4백평으로 한층은 강당과 식당 주방, 한층은 사실상 지하층에 속하는 것으로 사무실과 샤워실이 있는 약 70명 정도의 집회나 회의가 가능한 건물이다. 그 뒤에있는 3개동은 숙소다. 2개동은 2층침대 24개에 48명이 투숙할 수 있게 되었고 나머지 l개동은 온돌로 20여명이 잠잘 수 있는 시설이다.
또다시 이곳에 필요했던 것은 수영장이었다. 후원회 이사 경남교역 사장 정원성씨가 우리들의 소망을 알고 수영장시설의 비용을 기증해 줌으로써 이젠 모든 것이 갖추어진 아담한 캠프장이 마련되었다. 지금은 여름이면 2, 3개월전부터 예약해야만이 캠프장을 이용할 수 있는 실정이다. 다만 너무 협소해서 1백명이 넘는 회의는 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아마 70년 제24회 전국대회때 일이다. 그 해는 캠프가 준공된지 얼마 안되고 대회 규모도 지금보다 좀 작았기 때문에 다소 무리가 되더라도 우리 건물. 우리 시설에서 하자는 의견이 절대 다수여서 대표의 수를 될수 있는한 줄여서 1백50명 규모의 대회를 소사 버들캠프에서 개최했다. 최대한 1백명밖에 수용할 수 없은 시설에서 50명이 더한 1백50명을 받는다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젊은 사람들이 다소의 희생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생들은 옥상에 텐트를 치고 자개 했고 Y틴들은 수영장 옆에 있는 잔디밭에 텐트를 치고 자게 했다. 그런데 그것이 장마때가 되어 회의 5박6일중 반이 비오는 날이었기 때문에 밤이면 박 「에스터」시는 혹 물이 텐트로 스며들지 않나 싶어 돌아보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걱점이 되어 불안해 할뿐 한번 가봐 주지도 못하고 걱정만 했다. 그 이후 소사에서는 우리 자체모임도 1백명이 넘을 때는 하지 않기로 했다.
캠프가 그린벨트에 묶여있기 때문에 증축도 못하고 있다.
버들캠프 정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올려다보면 아담한 한식 기와집이 보인다. 약간 어울리는 것같지 읺지만 봄철 꽃이 하창 필때 보면 운치가 있는 건물이다. 이 건물은 하와이교포 김신일여사가 기증한 돈으로 그가 희망하는대로 지은 집이다.
그가 기부한 돈으로만 짓다보니 29평밖에 되지 않았다. 김신일 여사는 박「에스터」 씨와 어머니와 친구가 되는 분으로 이 버들캠프가 한국 소녀들의 심신을 단련시키는데 쓰이는 곳이라 하여 돈을 기증한 것이다. 여사의 선친은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어떠한 방법으로든 구할 수있을것인가 하는 생각에서 금연을 해 돈을 모아 왕께 바쳤다는 말이 있는데 그렇게 걱정했는데도 불구하고 한일합방이 되었고 이 소식에 너무 상심한 나머지 김여사의 아버지인 무명의 애국지사는 애통 끝에 결국 별세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의 두 따님중 한사람인 김신 일여사는 사진 결혼이 유행하던 때 하와이로 시집갔다.
성공한 케이스로 돈도 많이 벌었다. 그는 아버지의 우국정신, 구국정신을 이어받아 모은 돈을 나라를 위해 쓰고 싶었다. 일찍부터 친구의 딸인 박「에스터」씨를 알고 있었고 그가 고국에 나가 YWCA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쉽게 박「에스터」씨와통할수 있었고, 특히 한국의 소녀들을 위해 캠프장이 된것도 들어 알았다. 그는이 일에 참가하는 것이 보람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한국돈 2천만원에 해당하는 돈을 즐거운 마음으로 내놓았다.
건축위원회가 한옥을 지을 것을 결정하여 29평짜리 얌전한 한옥이 세워진 것이다. 그것을 「한국관」 이라 이름짓고 거실에는 여사의 뜻을 기리는 모윤숙씨의 시가 족자로 만들어져 걸려 있다.
『조국은 멀고도 가까운
고마움의 고향이러니
오직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변함없는 자애와 희생으로
김신일여사 여기 손을 펴시니
오늘 그 보람이 한국관을 이루었다.』
약 4년에 걸친 세월동안 한국Y연합회는 많은 것을 얻었고 바라던 일들이 착착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는 물론 박 「에스터」 씨를 비롯한 Y에관계한 수많은 회원들과 지도자들의 신념과 기도와 협력에 의한 것이었다고 믿는다. 또 국내외를 막론하고 YWCA의 정신과 뜻을 알아준 많은 동지, 유지들의 성의가 합해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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