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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무역불균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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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 6월17일 하오, 동경시내 한복판에 있는 일 통산성 바로 맞은편의 반야빌딩5층 회의실에는 한일 두 나라의 석유화학업계 대표 12명이 마주 앉았다.
이 자리에서의 회의록을 다시 펼쳐보자. 과연 이들이 왜 모였는지, 그보다도 지난 17년동안 2백31억달러라는 엄청난 규모로 누적된 한일무역역조에 대한 일본의 인식이 어떤 것인지, 또 우리측은 왜 매번 시정일변도의 「먹혀들어가지 않는 발언」만을 계속하는지 등등을 마치 한편의 희곡을 읽듯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이날 양측 대표들 사이에 오간 발언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관세 물면 사주겠다>
▲한국대표=일본정부는 자국산업의 보호를 내세워 올해 4월l일부터 폴리에틸렌·폴리스틸렌 등 합성수지에 대한 일반특혜관세(GSP=개도국의 수출을 돕기위해 품목에 따라 0% 또는 저율의 관세혜택을 주는 제도)한도액을 작년 수준의 19%에 불과한 연 45억엔으로 크게 줄였다. 더우기 한 나라로부터의 특혜수입액이 한도액의 절반을 넘으면 그 이상은 GSP혜택을 주지 않는 1/2금지조항을 신설함으로써 실제로 그 타격은 더욱 크다.
한국업계의 최소한의 가동률 유지를 위해 일본은 적어도 지난해 수입한 것만큼은 올해도 GSP를 적용해 수입해야 한다. 더구나 현재 양국은 심한 무역역조인데 선발 일본이 후발 한국을 도와줘야 하지 않는가.
▲일본대표=GSP제한이 한국측에서 볼 때는 보호인 것 같으나 일본측에서 보면 보호가 아니다.
…중략…
▲한국대표(한양화학의 다우케미컬측 미국인 부사장) =도대체 일본은 한국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한국을 보는 관점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한다.
▲일본대표=한국을 선진국으로 보고 있다. GSP는 개도국에 대해 공평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중략… 금번조치는 수입을 금지한 것이 아니다. 관세(평균11%)를 물기만 한다면 수입문호는 얼마든지 개방돼있다.
▲한국대표=높은 관세를 물면서까지 수출할 수 있다면 굳이 여기까지 와서 회의를 갖겠는가.
…중략…
▲한국대표=길게 보아 한일관계는 계속된다. 또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고부가가치품을 수입하게 될 것이지만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일반적인 범용품목만을 수입할 것이다. 그러니 이번과 같은 조치는 취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은가.
▲일본대표=한국도 이번 기회를 계기로 국제경쟁력을 배양하는 것이 좋겠다.
…중략…
▲한국대표=무슨 해결책을 찾아보자. GSP운용상의 융통성을 발휘할 수는 없는가.
▲일본대표=기준선을 바꾼다는 건 어렵고 현재의 선을 전제로 한다면 상담이 가능하다.
…중략…
▲한국대표=오늘은 상호입장을 들은 것으로 하고 다음에 다시 만나 상담할 기회를 갖자.
▲일본대표=또 만나 보았자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될 뿐이다.

<미·ec시장엔 굽실>
협상은 약 2시간만에 이렇게 끝이 났다.
『일본정부는 지난해 10월과 12월 두 차례나 세계 모든 나라와의 무역균형을 찾기위해 시장을 개방하고 수입제한을 풀며 관세를 내리겠다고 공공연히 밝힌바 있읍니다. 한대 겨우 넉달만에 우리에게 이처럼 약속을 어기다니요. 사실 나라전체의 수출규모에 비하면 현재 우리 유화업계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금액상으로는 얼마 안됩니다. 그러나 돈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반년도 안가 바뀌는 그들의 태도가 우리는 심히 못마땅한 것입니다.』
김창규 한국석유화학공업협회 회장(호남에틸렌 사장)은 지난 4월12일 역시 동경에서 있었던 14차 한일민간경협위 석상에서도 이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했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측의 성의있는 답변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 대표단의 동경회의록을 자세히 읽어봤읍니다. 한국이 선진국이라구요? 그들은 필요할 때마다 상투적으로 이런 상식이하의 발언을 합니다.』
이같은 합성수지건은 하나의 작은 예에 불과하다. 올해까지 17년간을 줄곧 한국시장에 많이 내다팔고 조금 사가는 식으로 일본이 챙겨간 2백31억달러는 VTR·반도체 등 최신기술의 이전에는 인색한 대신 이미 낡아빠진 기술은 적극적으로 팔아넘기며 또 그 기술로 만든 우리 상품은 행정지도·관세장벽·수입금지 등 갖은 방법으로 판로를 막아버리는 일인특유의 상술이 쌓이고 쌓인 결과인 것이다.
『툭하면 자국산업 보호를 앞세우는 것이 일본인데 그럼 최근의 미일 자동차분쟁, 반도체 스파이사건 등을 일본은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김 회장의 이같은 지적말고도 당장 우리에게는 지난 76년 겪었던 한일 생사분쟁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틈나는 대로 판로보장을 미끼삼아 한국의 생사증산을 부탁하며 막대한 규모의 견직기까지 팔아 이익을 챙겼던 일본이 2년만에 대한견직물수입을 규제하는 농간을 부려 당시 48만가구에 달했던 국내 양잠농가와 견직체계는 말할 수 없는 진통을 겪어야 했다.
『이번 일만 해도 일본측은 자신들이 시장개방, 관세인하의 공약을 조금도 어기지 않았다고 나올게 뻔합니다. 그러나 한 껍질만 벗겨보면 역시 얄팍한 명분일 따름이지요.』
즉 일본정부는 지난 1월 67개 품목의 수입절차를 간소화하고 지난5월 2백25개 품목의 관세를 없애거나 내린다는 내용의 이른바 시장개방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 대상품목이란 것이 모두 미국과 EC선진국들이 요구해오던 품목들일뿐 한국을 비롯한 개도국들이 요구하고있는 품목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일본에는 선진국과의 무역역조만이 시정의 대상이지 개도국과의 무역역조는 문제삼지 않는 것이 그들의 말마따나 「세계 경제발전에 적극 기여하는 길」인 것이다.
한일무역역조의 첨병격인 19개 주한일본상사들의 상행위도 역시 얄팍한 상술의 표본이다.
이들 일본상사를 통한 한국상품의 대일수출은 최근 몇년간 해마다 줄어들거나 거의 늘지 않았는데도 이들이 알선하는 일본상품의 수입은 해마다 늘어 지난해에는 모두 21억6천5백만달러에 달했다.

<우리측 반성도 필요>
더구나 이들은 최근 대한수입확대의 압력을 받자 일본상품에 대해 높은 관세를 매기는 미·EC시장에 우리상품 수출을 대신 알선해주고 커미션도 벌며 생색도 내는 수법을 쓰고 있다.
한일무역역조의 시정을 위해선 물론 우리측의 반성도 필요하다. 가깝고 비슷해 거래가 손쉽다는 이유하나 때문에, 전화 한 통이면 복잡한 서류 필요없이 부품 몇개에 라이터라도 하나 끼워들고 당장 날아오는 일인들의 「잔맛」때문에 다른 선진국사정에 어두워 모르고 들여다놓은 낡아빠진 일제기술과 시설에 지금도 어쩔수 없이 물려있기 때문에 대일무역적자는 해마다 쌓여가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 대한 상도의 강의는 소용없는 일입니다.
일인들이 아파할 우리측 대안없는 협상에 그들은 응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지금부터라도 일본과의 아무리 작은 거래에서도 관민이 함께 국익을 염두에 두고 상담을 벌인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김 회장이 지적하는 대로 수임선의 다변화, 국내 산업구조의 개편, 경쟁력의 배양 등 여러 대안들은 당장 어렵더라도 그 실행이 늦으면 늦을수록 대안으로서의 가치를 잃게 마련인 것이다. <김수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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