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학살고발에 평생바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YMCA강당에서 59년전의 관동대지진 화살만행을 고발하다 뇌졸증으로 숨진 강석천옹(82)의 장례식은 3일상오10시, 서울정릉1동113 자택에서 거행키로했다.
강옹은 관동대지진 당시의 참상을 직접 체험하고 목격한 인사중 몇명 안남은 생존자의 한사람이었다.
충남공주출신인 강옹은 경성제1고보 (경기고의전신)를 졸업하고 총독부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동경유화중이던 23년 관동대지진을 겪었었다.
강옹은 관속대지진이 일어나『조선인이 살인·방화·약탈을 한다』는 헛소문이 퍼지면서 한국인유화생 10명과 함께 「보호」라는 명목으로 10여일간 동경판교경찰서에 구류됐었다. 경찰서에서 풀려나자 강옹은 당시 동경YMCA총무이던 최승만씨등 유학생들과 함께 진상조사단을 구성, 한국인의 피해상황을 밝혀내고 일본정부에 항의하는 일에 앞장섰다.
강직하고 헐기넘치는 성격의 강옹은 대학졸업후 미쓰비시(삼능)강사에 근무하면서 한국인광부에 대한 차별대우와 착취를 직접 사장에게 공개장을 내는등 항의했고 일제말기에는 은둔생활로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는등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평소에도 『일본의 잔학상을 요즘 젊은 세대들은 모른다』며 개탄해왔고 그동안 계묘구락부회지나 YMCA에서 출간되는「청년」이란 회지에 「3·1운동의 의의」 「관동대진재경험에 관한 나의 의견」 등을 발표했었다. 강옹은 미쓰비시회사에서 15년간 근무하다 43년 귀국후 대한중석회사 내무부고위관리를 지내기도했다.
맏사위 이종하씨(53·연세대교수)는『최근에도 위스키 1병을 거뜬히 마시시던 건강이었다』며 『일제가 남긴 빚은 영원히 잊지말자는 교훈을 남겼다』고 슬퍼했다.
부인 윤지순씨(81)는『강연을 앞두고 원고를 준비하느라 3일동안 거의 잠을 못 주무셨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고인의 장지는 경기도고양군벽제면 선영, 연락처(914)1001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