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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짜리 평생직장 … 날 위해 준비한 환갑선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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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3년 전쯤에 그를 만났었다. 그러니까 2001년 11월 말 그가 택시 일을 시작한 지 딱 한 달 되는 날, 새벽 일터에서 그를 만났다. 택시기사 김기선(61)씨. 그해 7월까지만 해도 직원 30여 명을 둔 영풍금고의 최고경영자(CEO)였던 그는 쌀쌀한 초겨울 오전 5시에 고무장갑을 끼고 차유리를 닦는 영업택시 기사로 바뀌어 있었다. 아직 임기가 남아 있는 대표이사직을 그만두고 갑자기 왜 택시를 몰 생각을 했을까.

"사실 임기는 내년이 만료지만 서둘러 나온 건 나름대로 계산이 있기 때문이었죠. 법인택시를 3년 몰아야 개인택시를 살 자격이 생깁니다. 3년 뒤면 제 나이가 환갑이 됩니다. 환갑 기념으로 개인택시 기사가 되는 게 제 꿈입니다." 김씨는 제2의 인생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많은 사람들의 고민에 대해 설득력있는 답을 삶으로 보여준다.

그는 올 1월에 개인택시를 가지게 됐다. 그리고 그간의 경험을 3년 동안 꼼꼼히 기록한 '택시일기'를 추려 책('즐거워라 택시인생'웅진지식하우스 간)으로 펴냈다.

잘 알고 지내던 지인을 우연히 길에서 만나 반갑다고 인사를 하면 슬금슬금 피하는 눈치를 느꼈던 전직 CEO 택시기사. 그러나 그는 오히려 어깨에 힘주면서도 스트레스와 불안을 달고 살던 예전의 삶보다 지금이 훨씬 즐겁다고 말한다. 3년의 시간은 그의 얼굴빛을 햇살에 그을게 했지만 표정은 더 밝아졌고 또 젊어졌다. "개인택시를 몰게 된 뒤로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어 좋습니다." 구입한 지 이미 반년도 더 됐지만 그는 자신의 대형택시가 자랑스러운지 보닛을 쓰다듬으며 "이것이야말로 나의 한 평짜리 평생직장"이라고 말한다.

'택시기사 김기선' 은 어떻게 살았을까. 지난 시절 기업경영자답게 그는 2001년 11월부터 2004년 10월까지 3년 동안의 기록들을 정리해 통계로 내보인다. "영업 일수는 912일이었고, 손님의 승차횟수는 2만641회였습니다. 하루 평균 승차횟수로 따지면 22.63번이었고, 외국인 손님은 총 254회 태웠으며 봉사료를 주신 손님의 비율은 15.9%였습니다." 그는 또 경기가 나빠질수록 남성 손님이 감소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경험칙을 내놓기도 한다.

그는 책 제목처럼 택시 인생을 즐거워하고 있었다. 인생 후반전을 성공적으로 펼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첫째는 마음의 준비다. 회사 택시기사의 한 해 수입은 어림잡아 1500만원 안팎이다. 신용금고 사장 연봉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 액수다. 그것만 놓고 본다면 초라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한다. "부자란 돈의 액수가 아니라 자기가 가진 돈에 얼마나 만족하는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가 택시기사가 되려 했을 때 운수회사를 하는 사촌형이 자기 회사로 오라고 권했다. 그는 거절했다. 쉽게 적당히 일하는 건 질색이었다고 말한다. 둘째는 우정의 힘이다. 이 새로운 시작을 위해 친구 3명과 '작당'을 했다. 그중 한 명은 중도 포기를 했다. 어쨌든 전직 대우증권 지점장, 전직 삼립식품 부사장과 김기선씨는 동시에 택시기사가 됐고, 자주 만나 서로를 격려했다. 셋째는 일을 즐기는 것이다. 그는 경영자 시절의 노하우를 택시기사 일에 조금씩 적용하면서 손님들을 즐겁게 하는 데 맛을 들인다. 귤과 껌을 사 와서 제공하기도 하고, 먼저 인사하기, 하소연 들어주기, 그리고 스마일 마케팅을 실천하면서 '유쾌한 택시기사'가 돼 왔다. 넷째는 건강을 챙기는 일이다. 택시 일을 하면서 그는 트렁크에 짐을 싣고 내리는 승객을 돕기도 하고, 장애인을 부축하기도 하면서 그것을 일종의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다섯째는 돈 버는 일보다 만족감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외국인 근로자들이나 형편이 어려워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택시비를 할인해 주기도 하고, 아예 공짜로 태워 주기도 한다. 일하면서 사회봉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건 얼마나 축복인가. 그는 그렇게 생각한다.

힘겨울 때는 없었을까. 첫 손님부터 실수 연발이었다. 새벽에 한강다리를 건너 용산 근처에서 한 사람이 손을 들었을 때 이 초보기사는 흥분해서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그가 탔을 때 너무 당황해 미터기를 꺾지 않았다. 그 손님을 내려준 다음부터는 이상하게 차를 세우는 사람이 없었다. 가만히 보니 이번엔 미터기를 꺾은 상태로 운전하고 있었다. 빈 차라는 표시등도 없이 달리는 택시를 누가 세우겠는가. 그 다음에 모신 손님의 경우엔 지리를 잘 몰라 땀을 뻘뻘 흘렸다. 같은 곳을 몇 바퀴 뱅뱅 돌다 결국 큰길에다 손님을 내려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노인정을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퇴직 후 할 일이 없어 고스톱이나 치고, 멍하니 앉아 있는 그런 공간을 정부가 노인 위한답시고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얘기다. 눈높이를 조금만 낮추면 할 일이 얼마든지 있으며 육체를 움직이는 일이야말로 노후의 삶을 건강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정년퇴직 이후의 인생을 시작하는 '후배'들에게 이런 얘기를 해준다. "퇴직자가 불행해지는 건 돈이 없어서라기보다 자신이 쓸모없어졌다는 기분 때문이죠. 사회 차원의 대책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스스로 여생을 개척하려는 자세입니다. 직장을 잃더라도 일까지 잃어선 안 됩니다." 지난 3년여 동안 오전 4시부터 몸을 움직이며 새로운 생을 개척해 온 그가 매조진 생각들이다.

글=이상국 기자, 사진=임현동 기자

◆ 택시 운전을 해서 나쁜 점

(1) 사고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 도로 위를 달리는 일은 자기만 조심하고 잘한다고 완전히 안전해질 순 없다.

(2) 힘들고 고달프다. 새벽잠도 줄여야 하고, 하루 종일 운전대에서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 택시 운전을 해서 좋은 점

(1)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다.

(2) 가정이 화목해진다. 늘그막엔 부부가 떨어졌다 만났다 하는 '변화'가 필요하다. 그래야 마주 앉아 싸울 틈이 없다.

(3) 밥은 맛있고 잠은 달다.

(4) 노동 후 땀흘린 뒤의 즐거움은, 사우나의 땀에 비교할 것이 아니다.

(5) 봉사활동이 가능하다. 마음만 먹으면 어려운 이웃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6) 80세가 넘어도 일할 수 있으니 정년이 없다. 가속 페달 밟을 힘만 있으면 된다. 87세의 고령 운전기사도 있다고 하지 않는가.

(7) 쉬는 날에 등산이나 축구 등으로 건강을 보완할 수 있다.

(8) 자본이 필요없으니 망할 염려가 없다.

(9) 종업원 관리하느라 골치 아플 필요가 없다.

(10) 늘 새로운 손님을 만나니 지루할 틈이 없다.

(11) 겪어보지 못한 사회의 이면을 체험할 수 있고, 인생 상담을 해줄 수도 있다.

(12) 나이나 직업에 상관없이 다양한 대화상대를 늘 만난다.

(13) 혼자 하는 일이니 남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다.

(14) 일과가 끝난 뒤 집으로 일거리를 들고갈 필요가 없다.

(15) 일정한 수입이 있으니 자식에게 손 벌릴 일이 없다.

(16) 늘 긴장하고 자극을 받으니 치매 예방엔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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