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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도청 테이프 후폭풍] 검찰이 풀어야 할 의혹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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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안기부의 불법 도청 테이프 유출'사건을 둘러싼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천용택 전 국정원장의 비리가 담긴 불법 도청 테이프가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안기부 불법 도청조직인 '미림'의 부활에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깊숙이 개입했다는 의혹이 27일 불거졌다. 일부 언론에 보도된 도청 테이프 녹취록 등이 조작됐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앞으로 검찰은 미림팀 설립.운영에 개입한 YS.DJ정부의 고위 인사들을 수사선상에 올려놓고 이들의 구체적인 개입 경위 등을 캘 방침이다. 또 ▶미림팀의 도청 경로와 이들이 생산한 불법 도청 테이프의 숫자 ▶수거되지 않은 도청 테이프의 존재 여부 등 산적한 의혹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기로 했다.

◆ 사라진 도청 테이프를 찾아라=전 미림 팀장 공운영씨는 26일 공개한 자술서에서 1999년 자신이 몰래 갖고 나온 불법 도청 테이프 200여개를 국정원 감찰실 요원들에게 반환했다고 밝혔다. 국정원은 회수한 테이프들을 같은 해 모두 폐기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중 일부가 유출돼 DJ 집권 시절 유명 인사들을 견제하는 데 사용됐다는 확인되지 않은 주장도 흘러나온다.

당시 천용택 원장이 공씨가 도청 자료를 불법 유출시킨 사실을 알고도 처벌하지 않은 것을 두고 천 전 원장과 공씨 간에 말 못할 사정이 있었는지 등도 검찰이 규명해야 할 대상이다.

검찰은 사라진 도청 테이프를 포함해 92~98년 미림팀이 만든 모든 테이프를 일단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고 있다.

김종빈 검찰총장이 이날 출근길에 "이번 수사가 되려면 나타나지 않은 모든 테이프를 수거해야 한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공씨는 자술서에서 만약을 위해 숨겨둔 도청 테이프가 더 있는 것처럼 내비친 바 있다. 공씨가 재미동포 박인회씨가 아닌 제3자에게 넘긴 도청 자료들이 없는지도 명확히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 옛 안기부 고위 간부들도 수사 대상=이번 사건의 본질인 '불법 도청 테이프' 유출 경로 및 누설자 수사를 위해서는 과거 안기부의 최고 지휘부를 비롯해 전.현직 직원들에 대한 조사가 불가피하다.

미림팀은 서기관급 팀장(공운영씨) 1명과 사무관 1명, 6급 2명으로 구성돼 매일 밤 고급 한정식집과 호텔 식당 등에서 도청 공작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 중 일부는 현직에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검찰은 일단 정보기관이 관련된 사건이라서 수사 과정에서 보안을 지켜야 할 내용이 많다고 보고 있다.

한 관계자는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요청하는 등 국정원과 협조할 사안이 있으면 하겠지만 수사는 수사대로 진행할 것"이라며 강력한 수사 의지를 밝혔다. 검찰은 진상 규명을 위해 필요할 경우 압수수색을 실시하는 방안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 대통령 차남이 몸통? =한 시사주간지는 최신호에서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 해체됐던 미림팀의 재구성 및 활동의 실제 배후는 김 전 대통령 차남 현철씨"라고 보도했다. 이 주간지는 전직 국정원 직원 김기삼씨가 "김현철씨의 최측근 인사였던 오정소씨가 인천지부장에서 대공정책실장으로 부임하면서 미림팀이 재조직됐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대통령의 아들이 국가정보기관을 사조직처럼 이용해 불법 도청을 한 게 사실로 드러날 경우 파문이 클 것으로 보인다.

미림팀 재구성 지시자와 도청 내용 보고라인에 있던 인사들의 행태도 검찰이 밝혀야 할 대목이다.

도청 내용이 당시 오정소 대공정책실장을 거쳐 이원종 정무수석→김현철씨로 이어지는 비선 라인을 통해 보고됐다는 전직 안기부 직원들의 증언이 나와 있는 상태다.

열린우리당 민병두 전자정당위원장은 27일 확대간부회의에서 "불법 도청을 감행한 안기부와 이를 지휘한 권력 실세인 현철씨, 그리고 이를 방조한 김 전 대통령이 미림 사건의 '빅 브라더' 트라이앵글(삼각형)"이라고 말했다.

◆ 1년에 1000여 개씩 도청테이프 생산=공씨는 도청 대상에 대해 "현직 대통령을 제외하고 각계각층의 최고위층 인사들이 망라됐다"고 증언했다. 대통령 빼놓고 최상층부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미림팀이 활동했던 7년 동안 생산된 것만 해도 8000여 개는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공씨는 자신이 만든 도청 테이프 가운데 200여 개를 유출했다가 국정원에 반환했다고 밝혔다. 이중 공씨는 삼성그룹과 관련된 4개의 테이프를 재미동포 박인회씨에게 빌려줬고, 그것이 이번 사태의 원인이 됐다. 검찰은 또 다른 테이프가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공개될 경우 사회적 혼란이 엄청날 것으로 판단, 공씨 외에 나머지 미림팀원들이 외부로 유출한 것은 없는지 등에 대해서도 철저히 조사키로 했다.

◆ 보도 과정도 의문=MBC가 재미동포 박씨로부터 도청 테이프를 입수해 보도하는 과정도 의문투성이다. 박씨는 공씨로부터 잠시 빌린 도청 테이프로 복사본을 만든 뒤 공씨 몰래 삼성그룹을 찾아가 6억원을 요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 박씨가 순순히 공익적 목적으로 MBC에 도청 테이프를 넘겨줬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것이다.

박씨는 26일 MBC와의 인터뷰에서 "국익을 위해 도청 자료를 방송사에 전달했으며 돈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검찰은 도청 테이프가 오가는 과정에서 대가성 금품이 오갔을 수도 있다고 보고 금융계좌 추적 등을 통해 의혹을 규명할 방침이다.

조강수.장혜수.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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