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대·마트직원 위장 … 미국 언더커버 어디까지 커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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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미국의 심장부 워싱턴DC1가 연방대법원 앞. 낙태·동성애 등 미국을 뒤흔드는 논란과 관련한 시위가 연중 끊이지 않는 곳이다. 지금도 ‘생명권 사수를 위한 종교 연합’이라는 낙태 반대주의자들의 파란색 피켓과 ‘여성의 선택을 보장하라’는 찬성주의자의 빨간색 피켓이 팽팽히 대립 중이다. 그러나 이 시위대의 상당수가 순수한 시위대가 아니라는 주장이 나왔다. 대법원 경찰이 시위대를 견제하기 위해 심은 비밀요원이 다수 숨어 있다는 얘기다. 시위대의 과격 행동 및 테러 위협을 방지하기 위해 시위대로 위장해 시위대를 감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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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까지 한국 대학가에 흔히 등장했던 사복 경찰이며 신분을 위장해 잠입 활동하는 ‘프락치’ 논란을 연상케 한다. 뉴욕타임스(NYT)는 16일(현지시간)자로 신분을 위장해 활동하는 ‘언더커버(undercover)’ 요원이 대법원·경찰뿐 아니라 40여 개가 넘는 미 연방정부 유관 기관에서 적극 활용되고 있다고 집중 조명했다.

 미국의 언더커버 요원은 주로 냉전시대 미 연방수사국(FBI)에서 비밀리에 적진에 잠입시키는 이들을 칭했다. 그러나 21세기 미국의 언더커버는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했다. 활동하는 영역은 넓어졌고 그 숫자도 늘었다. 국세청(IRS)은 탈세 혐의자 적발을 위해 세무대리인으로 위장한 요원을 접근시키고, 농무부(DOA)는 저소득층을 위한 식료품 할인권의 불법 유통 현황을 조사하기 위해 미 전역의 마트에 직원을 위장취업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다. 미 항공우주국(NASA)은 우주항공산업 최신 기술의 유출을 우려해 직원 일부를 연구원으로 위장 근무시키고 있으며, 중소기업청(SMA)과 법무부 산하 주류·담배·화기·폭발물 단속국도 위장 요원을 곳곳에 배치한 상태라고 NYT는 전했다. 이런 활동을 했던 전 요원들의 다수 증언과 각 기관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다. 전 IRS 비밀 요원이었던 호세 마레로는 “탈세 관련 정보를 얻기 위해 의사로 위장 취업해 업계 정보를 취득한 경우를 알고 있다”고 말했다.

 FBI 등이 소속된 법무부는 언더커버 요원에 대해 엄격한 가이드라인을 갖고 있는 반면 IRS 등이 산하기관인 재무부의 경우 보다 너그러운 잣대를 적용해 논란이 일고 있다. NYT는 재무부가 “언더커버 요원이나 협조자들이 변호사·의사·종교인·언론인으로 위장해도 무방하다”고 규정하고 있다고 전했다. 극비리에 첩보용으로만 활용됐던 언더커버가 당국의 편리를 위해 남용되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배경이다. 이달 초엔 제임스 코미 FBI 국장이 2007년 워싱턴주 레이시 고등학교 폭탄테러 위협 사건 해결을 두고 “FBI 요원이 AP 기자로 위장해 테러 미수범에게 접근한 게 주효했다”고 털어놨다가 AP의 강력한 항의를 받은 바 있다.

 40여 개 기관이 언더커버를 남용하면서 각 기관의 비밀 요원끼리 충돌하는 웃지 못할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마약단속국(DEA)의 전 언더커버 요원 제프 실크는 애틀랜타에서 활약하는 마약밀수반을 감청하는 과정에서 FBI·뉴욕경찰국·이민관세단속국(ICE) 언더커버 요원과 뒤섞여 작전이 엉망이 된 경험을 전했다. 하나의 범죄 집단을 4개의 정부기관이 쫓으며 엇박자를 낸 것이다. 올 초 일선에서 은퇴한 실크는 “언더커버 요원 숫자가 늘어나면서 서로가 뒤엉키는 일이 빈번히 발생한다”고 털어놨다.

 세간에 드러나는 비밀 요원 행각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게 NYT의 분석이다. 첩보영화에나 등장하던 언더커버 요원이 미 연방정부 전역에 전방위로 등장하고 있는 배경엔 2011년 발생한 9·11 테러가 있다. 그러나 테러 위협을 빌미로 각 기관이 언더커버 요원을 남용하며 미국의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고 NYT는 전했다.

 유나이티드 리버티 등 미국 현지 매체들 역시 NYT를 인용하며 “정부가 빅 브러더(Big Brother, 감시자)가 되어 당신을 감시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주문한 음식을 받으러 문을 열었더니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얼굴을 한 배달원이 웃고 있는 삽화도 함께 실었다.

전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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