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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CA 60년|중단된 Y 활동|민족운동 겁내 일경찰 사사건건 감시·간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우리 민족이 당한 단련과 근조는 당한 사람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지만 젊은세대들도 책으로 영화로 방송으로 듣고 또 들어서 잘알고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너무 듣다보면 실감이 나기 보다는 오히려 『또그소리』하며 거부반응을 일으킬수도 있다.
그래도 그 탄압을 하고 뼈리게 느꼈던 당시 지성인들은 남의 지배밑에 있게 되면 어떻게 살아야한다는 실증을 기회있으면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인 것같다. 그런 본능의 발로로 받아주기 바라면서『또 그소리』로 오늘의 지면을 채워볼까 한다.
회 모든 집희는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고 집회를 하는 동안 경찰이 나와 있어서 일일이 다 기록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지적된 일이다. 이런 일제의 경찰을 경험한 우리들 60세이상 연령층의 사람들은 해방후 민주경찰에 대해서도 뭔지 모르는 선입견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유감된 일이다. 그런데 더욱 더 유감스럽고 불행스러운것은 요즘 젊은세대가 경찰에 대해 절대 신뢰감·호감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에 부닥쳤을 때다.
필자가 38년 미국에 공부하러 갔을때 그곳 경찰들의 대민봉사정신이 철저한 것을 보고 너무나 부럽고 좋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일본Y의 협조로 단독으로 세계Y에 가입했던 한국Y를 일본Y에 속하도록 한것도 일본총독부였으며 그들이 한국Y의 활동 하나하나를 감시하고 Y가 민족운동을 할까봐 꺼렸던 때문에 더욱더 간섭이 심했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들이 원한대로 간판을내리고 Y활동을 중지하게까지 된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크나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이화전문·연회전문·숭실전문등 미션계통의 전문학교들이 모두 총독부의 감시대상으로 저희들이 직접 운영을 하겠다고 나서기 까지의 사태에 이르렀다. 영어 과득을 없애고 미국갔다온 교수들은다 파면했다. 필자도 그 피해자의 한사람으로 43년12월 이화녀전을 물러나야 했다.
41년 진주만 폭격으로 시작된 미일전쟁(초기에 그렇게 의기양양했던 그들의 호칭으로는 대동아전쟁)은 한국민족에게 있어서 최대 최악의 수난기였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정책은 그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는 것은 두번다시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이를 증거할 수 있는 우리 60대의 사람들이 살아있을 동안까지 만이라도 기회있는대로 그 쓰라린 경험을 되새겨 보는 것이옳다고 생각된다.
일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라고한것 정도는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닐수도 있다. 그러나 집에서 식구끼리도 일어를 사용해야 된다고 했던것은 부모 자식간의 불신·불화를 빚었던 것이다. 학교에서 어린 아이들에게 집에서의 일을 보고하는 스파이 역할까지 시킨 일은 가슴의 피롤 끓게 하는 만행이었다고 본다.
사실 언어를, 특히 적국의 언어를 통달하는 것은 상대방을 정복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때의 강제적인 일어 상용은 우리들을 진저리나게 했기 때문에 해방후 일본이 다시 제계를 향해 일어나고 있을 때 우리 젊은이들에게 열심히 일어률 익히도록 했어야했는데 그렇게 못한 것은 다시는 우리 민족은 일어를 입에도 대지못하게 하겠다는 어리적은 마음때문에 또 한번 크게 과부을 한것으로 본다.
다음은 세계에서 또는 역사속에서도 그유례를 볼수 없는 진실로 악랄의 극인 창씨다. 아무리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않는 수법이라지만 일본인의 그 좁은 소견의 소산이었다고 밖에는 생각할수 없을것같다. 창씨에근 상당히 많은 이야기들을 남기고 있는데 그들이 우리민족을 탄압하는데 다른 일들은 애국운동을 하는 소수, 지식층의 소수를 대상으로 한것이었지만 창씨만은 한국민 전원을 대상으로 했기때문에 그반응도 컸다.
저희들이야 전민족을 통합하는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반대로 그들의 탄압정책에 대해 별로 느끼지 못하던 사람까지도 그악랄함을 느끼도록 해둔 처사었다.
창씨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어안이 벙벙했다.
그 반응에 있어서는 스스로 약삭빠르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명령에 복종하여 일본식 성을 취했고 끝까지 버티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할수 없다는 식으로 안고친사람도 있고, 신중하게 그래도 한국고유의 본관을 따서 한 사람도 있는가 하면 장난기를 띠어 자기 이름을 딴 사람도 있었다. 이룰테면 내오라버니는 김대연이었는데 자기이름 대연이라도 보존하겠다고 하면서 대연금작이라고 고쳤다. 김활난박사는 천성활난이라고 했는뎨, 그의 자서부에서 그 성에 대해 이렇게 술회한다.
『어느 친구에게 창씨에 대해 의논했더니 일본 작가의 이름 천성(아마기)이 어띠냐고 했다. 나는 선뜻 마음이 내켰다. 「하늘나라」라는 뜻이 내마음을 음직이게 했다.
여자들에게 몬빼라는 바지-한국의복으로 생각할때 고쟁이, 즉 속에입는 바지-까지 강제로 입히는그 무식스러운 처사도 지금 우리는 웃어넘길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할뿐이다.
젊은 남학생들은 학도병으로, 여학생들은 정신대원으로 모집하여 그것을 피하느라 서둘러 시집간 사람도 많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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