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심 부실해 상고 급증 … “하급심 심리 강화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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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민사재판을 받았던 A씨는 재판 도중 판사의 목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 않자 “말씀을 조금 크게 해 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재판장은 대뜸 “변호사를 선임하라”고 했다. 이에 A씨가 “형편이 어렵다”고 답하자 재판장은 “형편이 어려운데 재판을 왜 하느냐”고 핀잔을 줬다.

 지난달 7일 국회 법사위의 대법원 국정감사에서 서영교 의원이 ‘판사의 언행에 관한 진정 및 징계내역’ 자료를 통해 공개한 내용이다. 서울지방변호사회가 지난 5월 법관 평가와 함께 내놓은 자료에도 재판에 대한 불만이 가득 차 있다. 고압적이거나 막말을 하고, 원치 않는 조정을 강요하며 한쪽을 편드는 듯한 태도를 보인 사례가 많았다.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건 판사가 법정에서 당사자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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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관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은 게 부당하다며 소송을 낸 경찰관 박모(32)씨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상관의 지시가 없었고, 자신이 성실히 근무했음을 입증해 줄 동료 경찰관을 증인으로 신청했지만 재판부는 “사실증명서로 충분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씨는 몇 마디 말도 못해 보고 패소했다. 장주영 변호사는 “국민이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상고하는 이유는 하급심 결과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상고심 제도를 개편하려면 하급심에 대한 불신부터 해소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법원은 그동안 하급심 강화방안을 여러 차례 내놨다. ▶법관 교육을 강화하고 ▶연륜이 있는 판사를 단독 재판부에 배정하며 ▶전자소송제를 통해 판사 업무량을 줄이는 등의 내용이다. 특히 형사재판의 공판중심주의와 국민참여재판제, 민사소송의 구술변론주의 등이 잇따라 도입됐다. 서류에만 의존하지 말고 법정에서 당사자 말을 충분히 들으라는 취지였다. 하지만 1심 재판에 불복해 항소하는 비율은 지난해 42.3%(민사합의부 사건), 62.3%(형사합의부 사건)로 2009년(41.6%, 60.2%)보다 오히려 늘었다.

 같은 사안에 대한 결론이 법관에 따라 달라지는 ‘오락가락 판결’도 하급심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있다. 이달 초 서울중앙지법 형사11단독 우인성 판사는 대한문 앞 쌍용차 노조원 농성장을 철거하는 경찰을 방해한 혐의로 기소된 문모(53)씨에게 무죄 판결을 했다. 그러나 같은 혐의로 기소돼 같은 법원의 다른 재판부에서 재판을 받은 김모(54)씨에게는 유죄가 선고됐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어떤 재판부에 배당되느냐에 따라 판결 방향이 달라진다는 인식이 심화된 것도 상고심 사건 급증의 주요 원인”이라고 말했다. 나승철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은 “최근 항소심 판결을 보면 1심에서 판단한 사실관계를 바꾸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고, 재판도 2~3회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대법원도 상고법원 도입안 발표 때 하급심 강화방안을 함께 밝힐 예정이지만 획기적인 대책 없이는 항소·상고 급증 문제를 해소하기 어려울 것이란 시각이 우세하다. 한 로펌의 대표 변호사는 “판사 출신 변호사들 사이에서도 하급심 재판이 갈수록 부실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을 정도”라며 “하급심 강화를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민제·노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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