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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선생님 그리워 …‘중년의 꼬마들’모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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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정년퇴임을 앞둔 스승과 50대 제자들이 40년 만에 ‘마지막 수업’을 진행했다. 15일 서울 동작구 흑석초에서 최여규 서울창도초 교장(왼쪽 둘째)의 반주에 맞춰 제자들이 동요를 부르고 있다. [오종택 기자]

15일 오후 4시 서울 동작구 흑석초등학교 교실. 50대에 접어든 중년 남녀 30여 명이 모여들었다. 저마다 초등학교 시절 소속 학년과 반이 적힌 이름표를 달았다. 곧이어 최여규(62) 서울창도초등학교 교장이 출석을 불렀다. ‘중년의 초등생들’이 하나씩 손을 들고 “예”라고 대답했다. 국민의례와 애국가 제창이 끝나자 최 교장은 “자, 그럼 마지막 수업을 해 볼까요”라며 수업에 들어갔다.

 이날 모인 스승과 제자들은 1974년 처음 사제(師弟)의 인연을 맺었다. 40년 전 강릉교대를 졸업한 최 교장은 22살의 청년으로서 명수대국민학교(현 흑석초)에서 처음 교편을 잡았다. 당시 4학년 담임을 맡으면서 체육·사회 과목을 전담해 다른 반 학생들도 가르쳤다. 당시부터 많은 제자들은 최 교장을 ‘키다리 호랑이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의 수업을 들었던 제자들이 40년 만에 다시 교실에 모인 것이다.

 오랜 세월 소식이 끊겼던 스승과 제자들은 지난해 재회했다. 초등학교 동창들 사이에서 당시 가장 젊었고 열정이 남달랐던 최 교장의 소식이 궁금하다는 얘기가 돌았고, 수소문 끝에 창도초 교장으로 재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최 교장은 내년 2월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다. 제자들은 스승의 퇴임식을 열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자 최 교장이 “교단에서 처음 만난 제자들이었는데 내가 열정이 과해 체벌을 했던 기억이 난다. 거창한 퇴임식 대신 사과의 의미로 마지막 수업을 하자”고 제안했고 제자들이 받아들였다.

 이날 최 교장은 직접 오르간을 가져와 당시 교과서에 나왔던 동요를 연주했다. 지금은 사업가·공무원·회사원·주부가 된 제자들은 반주에 맞춰 ‘꼬까신’ ‘초록바다’ 등을 부르며 추억을 되새겼다.

 ‘중년의 행복한 삶’을 주제로 강의에 나선 최 교장은 “나이가 들수록 남의 흉을 보지 말고 항상 자신을 돌아보라. 드라마 보는 것도 좋지만 나이가 들수록 책과 가까이 지내라”고 조언했다. 몇몇 제자들은 40년 만에 다시 듣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적기도 했다.

 자영업을 하는 최문준(50·서울 방배동)씨는 “학교 마룻바닥에 콩기름을 칠해 청소하다 미끄럼을 타며 장난을 치면 어느새 선생님의 회초리가 번쩍 했다”며 “유난히 꼿꼿하고 청렴하셨던 분”이라고 기억했다.

 서울 양천구청 소속 공무원인 박창원(50)씨는 “베이비붐 세대라 한 반에 학생이 80명이나 있었는데도 선생님은 누구보다 무섭게 공부시키기로 유명했다” 고 전했다.

 자영업을 하는 송현우(50·경기 남양주시)씨는 “최 선생님은 ‘가난은 죄가 아니다’라고 말씀해 주셨다”고 회고했다. 운동 신경이 좋았던 송씨는 최 교장의 권유로 농구를 시작해 특기생으로 중학교에 입학했다. 학교 대표로 체육대회에 출전해 상도 탔다. 그는 “선생님은 ‘강원도 농가에서 태어나 고교에 진학했지만 생활비가 없어 오징어잡이 배까지 타면서 공부했다’는 체험담을 들려주셨는데, 달동네에서 사는 아이들이 많았던 시절이라 큰 힘이 됐다”고 고마워했다.

 40년의 세월을 거슬러 열린 마지막 수업은 교가를 부르는 것으로 끝났다. 수업을 마친 최 교장은 “교사란 직업은 부자가 되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게 아니라 학생을 행복과 성공으로 이끄는 일이라고 여겼다”며 “초임 시절부터 간직한 소명(召命)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글=신진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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