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 방문의 꿈" 꺾인 중공교포|심 양에 사는 양순덕 여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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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동경=신성순 특파원】중공 삼양에 살고 있는 한국 동포 양순덕 여인(57·심양시 황고7구 명렴로 명충리22호)이 형제자매들이 살아 있는 한국을 방문하려고 일본까지 왔다가 중공 당국의 허가를 얻지 못 해 l6일 무거운 발길로 중공으로 되돌아갔다.
15일 동경 시내 한국인 교외에서 기자와 만난 양 여인은『여기까지 왔다가 고향 땅을 밟지 못 하고 돌아가자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며 눈물지었다.
양 여인의 고향은 전북 순창.
한국에는 현재 큰언니「넙적이」(75·대전시), 둘째 언니「젖떼기」(66·충남 연기군 조치원), 남동생「판주」(53·대전시 판암동), 여동생「막매」(50·충남 천원군), 남동생「판옥」(48·대전시 대흥동), 남동생「금열」(46·전북 임실군)씨 등 6남매가 찾고 있으며 일본에 오빠 양판산 씨(61·일본 동경 중야구 야방64의2)가 있다.
양 여인이 일본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이곳에 오빠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어려운 길을 떠난 것은 일본이 목적이 아니라 고향 땅 한국을 찾자는 것이었다.
「인민화 공창」에서 노동하다 이제는 월 43원의 연금으로 생활하는 양 여인은 죽기 전 고향 땅을 밟아 보겠다는 일념에서 가족의 1년 생활비에 해당하는 1천 원을 빚내어 여비를 마련했다.
그러나 지난 4월2일 일본에 도착하고부터 양 여인의 기대는 하루하루 꺾여졌다.
일본에만 가면 어떻게든 한국에는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일본에 도착한 이래 동경의 한국 대사관과 중공 대사관을 여러 차례 왕복하며 알아본 결과는 한국 여행이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 대사관은 중공 측의 허가만 받으면 비자를 내주겠다는 대답이었으나 중공 측은 양 여인이 살고 있는 심양시 외사과의 허가가 없으면 안되겠다는 대답이었다.
양 여인은 심양시 외사과에 한국 방문을 허용해 달라는 탄원서를 보냈으나 비자 기간이 끝나 가는 지금까지 아무 소식이 없어 할 수 없이 발걸음을 들리게 된 것.
양 여인이 고향을 떠난 것은 18세 때인 1942년 일본군 위안부인 정신대의 강제징발 위협과 남편의 보국 대 징용을 피해 만주로 가는 남편을 따라 나선 것이 고향과의 이별이었다.
길림에 사는 시가 친척 하나만을 믿고 갔던 양 여인 부는 부 한국인 지주의 머슴살이에서 시작, 저습 지대를 개간해 농사를 짓는 등 형언할 수 없는 고생을 치렀다.
만주가 중공군에 의해 적화된 뒤인 50년 심 양으로 나와 58년부터는 월 23원의 봉급으로 공장 노동자 생활을 했으나 번듯한 집 한 칸 마련할 수 없었다. 그 동안 양 여인 부부는 송명섭 씨(40·신의주 거주)등 6남매를 낳아 심 양에서 어려운 대로 정착했으며 이제는 막내 춘섭 군(19·심양 인민화 공창 근무)까지 고등학교를 마치게 해주었다.
그러나 꿈에도 못 잊는 것은 고향과 부모 형제들. 5년 전 위암에 걸린 남편 송영주 씨(사망·당시 61세)는 죽기 전 고향에 편지나 띄워 보 자며 30여 년 전 주소로 양 여인의 친정과 시댁에 편지를 띄웠다.
그런데 기대하지 앉았던 회답이 한국으로부터 날아들었다. 한국의 친척들은 중공으로부터의 편지를 받고 일본에 있는 오빠 양판산 씨를 통해 소식을 전한 이래 그 동안 수십 차례의. 편지 왕래를 할 수 있었다.
4년 전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양 여인은 혼자라도 고향 땅을 밟겠다고 애를 쓴 끝에 이번 일본 방문이 이루어지게 쬈다는 얘기다.
양 여인이 전하는 중공에서의 생활은 어렵기는 해도 자유로운 것 같았다.
일요일이면 교회에 나갈 수 있고 북한 김일성에 대한 비관도 자유롭다.
현재 살고 있는 심 양의 한국인 부탁에는 한국인만 5백 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한국의 방송을 듣는 사람이 많으며 편지 왕래도 잦은 편이다.
중공당국은 한국인에 대해 무슨 이유인지 우대 정책을 펴 쌀 배급도 중국 사람의 2배를 받고 있다.
한국인만으로 된 초·중·고·대학이 모두 있으며 최근에는 일본어 공부에 대한 열이 높아져 과외수업까지 받고 있다.
그러나 생활은 전반적으로 어려워 흑백 TV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부자 소리를 들으며 양 여인 집의 경우 결혼 안 한 두 아들의 월급까지 합쳐 월 90원 정도의 수입이 있으나 옷 한 벌에 23원이나 하기 때문에 언제나 쪼들리는 생활을 면치 못하고 있다.
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부정부패가 만연, 공산사회인데도 관리들에게 뒷돈을 주어야 일이 쉽게 트이며 도둑이 심해 마당의 변소에 가는데도 방문을 잠가야 할 정도라는 것.
양 여인은 이번 한국방문을 위해 1천 원을 친구들에게서 꿔 가지고 왔는데 앞으로 이 돈을 갚으려면 1년 이상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고 한숨지었다.
가족 재회의 꿈이 무참히 깨진 양 여인의 슬픔을 보고 인도적 견지에서 중공의 우리 교포들에게도 모국을 방문할 기회가 주어져야 할 것이라고 재일 교포들은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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