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제자·철농 이기우>|반민특위(1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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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반민특위에 대찬 압력은 점점 거칠어져 갔다. 내부에서조차 서로 충돌했다. 최초의 내부충돌은 4윌20일에 내려진 박흥식 피고의 병 보석 결정.
재판부는 심한 설사와 불면증 등을 이유로 백 만원 보석금의 석방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검찰 부는 전원 사표 제출로 박 씨의 병 보석에 반발했다.
국회는 23일 재판부와 검찰 책임자를 불러 경위를 들었다. 권승렬 검찰부장은『박 씨의 보석에 있어 형무소의 진단은 아뫼바 적 리에다 잠을 못 자 정신병 증세를 나타내고 있다고 하나 현재는 그런 증세가 없다. 또 설혹 정신병이라고 한다면 정신병 전문의의 진단이 필요할 것』이라고 이론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그는『그러나 검찰의 총 퇴진 결의는 박 씨의 보석이 주된 원인이 아니라 한 계기가 된 것이다. 검찰은 국민의 염원을 좇아 최선을 다해 왔으나 힘의 부족함을 느껴 전부터 퇴진을 생각하고 있었다. 늘 살얼음판을 밟고 나가는 느낌이었다』라고 검찰 업무 진행을 둘러싼 갖가지 압력과 고충을 털어놓았다.
김병노 재판부장은『전 민족의 정신적 또는 자손만대에 미칠 사업이므로 재판부에서는 법에 따라 공정히 재판을 수행해 본 것이며 세상의 여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보석이 중대한 것은 아니다. 보석이 박 씨를 아주 석방하는 것도 아니고 형을 삭감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진단서가 반드시 보석의 참고자료가 되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라고 맞섰다.
이런 내부파동에 대해 국회는 중간적 입장을 취해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보다 큰 시련이 밖에서 다가서고 있었다.
5월17일 당국은 최태규(정선·무), 이구수(고성·무)두 의원의 구속에 이어 18일엔 소장파의 리더이던 이문원 의원(익산을·무)의 구속을 발표했다.
이들 세 의원의 혐의는 국가보안법위반. 이들은 국회가 폐회 중이던 4월18일 발부된 구속영장에 의해 비밀리에 구속돼 조사를 받고 있었는데 국회가 개회되자 당국이 발표하게 됨으로써 세상에 공개된 것.
정계를 1년 남짓 폭풍 속에 몰아 넣은 국회 푸락치 사건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국회 푸락치 사건은 그 무렵의 정치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더욱이 반 민법 처리에는 하나의 분수령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충격적 사건이었지만 그 당시도 지금도 의문을 남기고 있다. 사건 발단에서 재판을 거치는 동안 밝혀진 사건 내용.
△49년 3윌 최운하 서울 시경 사찰 과장 실에서 오제도·선우종원 검사 등 이 회의를 했다. 주제는 김약수 부의장이 중심이 된 소장파 의원의 동향. △회의 결론은<외국군 철수><남-북 협상 론>등 이들의 정치노선은 공산당의 대남 정치 공작과 맥을 같이하고 있어 배후에 불순세력이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조사해야 한다.△이 결론에 따라 최 사찰과장은 민원형사들로 특별 사찰 반을 편성, 김약수 노일환 이문원 김옥주 의원을 집중적으로 미행, 조사했다.△이윽고 4월 이들이 남로당 중앙 위원 이삼혁 이재남 김사복 등과 접촉하고 있음을 알아냈다. 이들은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미군철수><미국의 군사원조 반대>등을 주장했다. 외국군 철수 결의안을 국회에 제안했다가 실패하자 외국군 철수건의 연판 장을 작성, 62명의 의원으로부터 서명을 받아 유엔 한 위에 제출한 것은 이삼혁의 지령에 따른 것이다.
이런 계보를 파악, 1차로 세 의원을 구속했다. △경찰은 이삼혁 등의 연락 원 박시현→한 중년 여인을 포착했다. △6윌10일 이 중년 여인이 개성으로 향하는 것을 미행, 개성서 덮친 결과 그녀의 은밀한 곳에서 비밀암호문서를 발견했다.△이 여인은 정재한으로 밝혀졌으며 암호문서는 해독결과 남로당 공작 조가 박헌영에게 보내는 소장파 의원 활동보고서임을 확인했다.
이 사건에서 이삼혁 등 이 체포됐고 1심에서 전윈 유죄 판결이 났다. 그런데도 이 사건이 의문을 남긴 것은 세 의원의 구속에서 비롯된 사건이 의원 15명의 구속으로 확대되고 반 민법 처리 등 정치문제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 대한오늘의 증언들을 살펴보자.
△선우종원 씨(당시 법무부 검찰과장)=49년 3윌 검·경 합동으로 김악수 그룹을 사찰 했다. 이들이 추진한 보안법 제정반대·외국군철수·남-북 협상 론 등은 당시 공산당 주장과 맥을 같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달간의 추적 끝에 남로당과의 접선을 확인하고 계보도 알아냈다. 이삼혁은 노일환 이문원을 국회 내 공작 핵심으로, 박윤원 이구수 김옥주 배중혁 최태규 등을 그 전위로 하여 소위 남로당 7원칙 실현에 혈안이었다.
△양한모 씨(현 크리스천 사장 연구소장·49년 정부 수립 후 까지 남로당 서울시당 부위원장을 지냄)=국회 푸락치 사건·법조 푸락치 사건 등은 남로당 중앙당부와 서울시당의 특수조직사업의 하나였다. 특히 국회 푸락치는 남로당이 온 힘을 기울였다.
미군 철수란 정치 공세는 그들의 지상과제였기 때문이다. 외국군 철수 결의안이 49년 2월 부결된 뒤에도 남로당 지도부는<외군 철수><대미무기원조 요청반대>를 중요과업으로 계속 추진했다.
△최대교 씨(당시 서울지검 검사장)=김병노 재판부장도『노일환은 그 부친도 내가 찰 알지만 분명히 좌익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안희경 씨(당시 서울지검 부장검사)=당시 나, 오제도·선우종원·정희택 씨 등 이 반공검사로 활약했다. 당시 상당수의 인텔리들이 좌익 사상에 동조했을 뿐 아니라 누가 정말 공산당인지 찍어서 잡아 낼 수가 없었다. 그저『네 친구 누구가 너를 공산당이라 더 라』하는 식의 인적 증거를 필수밖에 없는 것도 있었다.
당시「관제 빨갱이」라는 말이 있기도 했지만 그만큼 좌익세력을 색출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결국 허수아비를 하나 세워 놓고 거기에 두드려 맞추는 경우도 있었다.
△안호상 씨(당시 문교장관)=예를 들어 당시「18 교수단」이라 하여 우리 역사학의 거두인 이모 교수, 국문학의 이 모 교수, 사회학의 이모 교수마저 좌경해 있었다. 이처럼 지식층이 좌익의 정치공작에 말려들고 있던 때였다. 국회 푸락치 사건은 당시 국회의원들이 돈이 없었던 것도 한가지 이유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장홍염(제헌 의원)=노일환·김약수는 공산당이 아니다. 김약수는 조선 공산당 창당멤버였지만 전향해 8·15 후 한민당에 참여해 조직부장을 맡았다. 그는 한민당의 지나친 보수색깔을 싫어했지만 술·노름을 좋아하는 등 그의 성품으로 봐 공산당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문원·신성균 등은 일제 때 친일에 가까웠던 인물들로 남로당의 공작임을 모르고 동조 했을 지는 모르겠다. 이익흥(군정수도청 부 청장), 노덕술 최운하 등 이 이 박사를 싸고돌며『선생님을 반대하는 자들은 모두 빨갱이 입니다』라고 몰아 붙였고 이 박사도 이들 친일 세력을 이용했다. 국회 푸락치 사건은 친일 경찰이 조작한 것이다.
△김인식(제헌의원·소장파)=국회 푸락치 사건 관계자에 좌익은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조작했다기보다는 김준연 의원이 만들어 이 박사를 믿게 한 것으로 본다. 그 증거의 하나는 국회 푸락치 사건으로 시끄럽던 때의 어느 날 김 의원은 우리들 소장파 의원들을 명월 관에 초대해 한턱 내면서『한민당에 입당하면 없는 것으로 해주겠다』고 회유했다. 그래서 상당 수 의원들이 입당 원서를 썼지만 사건은 수습되지 않았고 입당도 안하고 말았다.
△오제도 씨(담당 검사)=국회의원들이 계속 잡혀 들어가자 신익희 의장이 찾아와『어쩌려고 자꾸 잡아들이느냐. 한미간에는 고위층에 공산당이 있으면 원조를 즉각 중단한다는 비밀협약이 있다』라고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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