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도 가세 … 중고차 시장 ‘폭풍의 언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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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의 신맛이 달라질 수 있을까. 소비자가 골탕을 먹기 십상인 대표적 ‘레몬 시장’인 중고차 시장에 대기업이 속속 진출하고 있다. 대기업의 명성과 실력이 신뢰 부재의 시장에서 믿음이란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현대차그룹 계열사인 현대글로비스는 9일 중고차 매입 사업인 ‘오토벨’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소비자가 전화(1600-0080)하면 원하는 장소와 시간에 전문가가 찾아가는 서비스다. 차량 상태에 대한 진단을 한 후 판매 가능한 가격도 제시한다. 소비자가 원하면 글로비스가 운영 중인 중고차 경매장에서 경매까지 해준다. 유종수 글로비스 이사는“믿을 수 있는 중고차 전문브랜드가 되는 것이 목표”라며 “차를 제값 받고 팔기 원하는 소비자에게 새 대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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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대기업도 이미 발을 들여놓았다. SK엔카는 소매 부문에선 터줏대감이다. 전체 중고차 거래의 30% 정도가 SK엔카 사이트를 거쳐간다. 신규 진출 업체엔 중고차 경매 시장이 교두보다. 렌터카 1위 업체인 KT렌탈은 3월 경기도 안성에 경매장을 세웠고 AJ렌터카가 9월 경기도 기흥의 서울경매장을 인수했다. 동화그룹 계열사인 동화엠파크도 지난해 중고차 경매 사업을 시작했다. 현대글로비스는 2001년 경매사업을 시작한 선두주자다.

 도매로 발판을 마련한 업체는 소매 시장으로 진입하고 있다. 동화엠파크는 ‘이지옥션’, AJ렌터카는 ‘AJ셀카’를 통해 개인 차량을 매입해 중고차 시장에 되파는 사업을 하고 있다. 당장 차익이 생기는 판매보다 중고차 매입에 먼저 뛰어드는 것은 시장 주도권 확보를 위해서다. 신건식 BS투자증권 연구원은 “신차에선 판매가 중요하지만 중고차는 매입이 핵심”이라며 “매입을 잘해 충분한 물량을 확보만 하면 파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일본의 대표적 중고차 매매기업인 ‘걸리버’도 매입이 전문인 회사다.

현대글로비스가 경기도 시화에서 운영 중인 중고차 경매장. [사진 현대글로비스]

 이처럼 대기업 진출이 활발해진 것은 시장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2009년 200만 대에 못 미쳤던 중고차 거래 규모는 지난해 330만 대를 넘어섰다. 그러나 여전히 소비자 불만은 크다. 소비자원의 중고차 관련 상담은 연간 10만 건이 넘는다. 게다가 기준으로 삼을 만한 시세가 없다. 미국에선 ‘켈리블루북’ 등에서 기초적인 중고차 시세를 가늠할 수 있고 이를 근거로 개별 차량의 특성을 감안한 매매가 가능하다.

 소비자 불만이 큰 점은 신규 진출 기업에 기회이자 숙제다. 미국 최대 중고차 매매업체(연간 87만 대)인 카맥스는 “전통적인 자동차 매매업체에 대한 근원적 불만족을 해결하는 것이 우리의 전략”이라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이 업체는 꼼꼼한 진단과 판매 후 보증을 하는 대신 가격 흥정 없이 새차처럼 정가에 중고차를 판매하고 있다. 그만큼 믿고 산다는 얘기다.

 한국에서도 여지는 있다. 연간 14만 대의 차를 경매하는 경매장 관련 업체가 시장에 들어오면 소비자가 믿고 참고할 수 있는 잣대가 더 풍부해질 수 있다. 경매장과 연계해 차량 처분이 용이한 사업 구조는 시장의 안정성을 높일 수도 있다. 중고차는 예측과의 싸움이다. 최고는 오늘 매입해 내일 파는 것이다. 보관 비용이 늘면 가격이 올라가고 팔기 위한 꼼수가 동원된다. 일본 걸리버의 경우 2주 이상 차를 보유하지 않는다.

 신차를 생산·판매하는 현대차그룹 입장에선 만만치 않은 과제가 있다. 판매 사원(딜러)의 수익원 중 하나를 글로비스로 넘겨야 한다는 점이다. 통계상 국내 중고차 거래의 40%는 개인 간 거래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개인 거래의 상당수는 새 차를 파는 딜러가 중간에서 알선료를 받는 경우”라며 “현대차 딜러들이 이런 수익을 포기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중고차 시장의 규모를 키우고 산업으로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유통 투명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영훈 기자

◆레몬시장=판매자가 아는 정보를 구매자가 알 수 없기 때문에 저질 제품이 유통되는 시장. 중고차처럼 물건을 산 후 품질을 알게 되는 시장이다. 영어로 ‘레몬(Lemon)’에는 불쾌하다는 뜻이 있다. 미국 경제학자 조지 애컬로프가 1970년 붙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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