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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까이는 게 인생이야, 장그래! 버티는 게 완생이야, 안 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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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드라마 ‘미생’엔 회사 옥상 장면이 많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사무실에서 쌓인 감정을 풀어놓거나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를 건네기도 한다. [사진 tvN]

“이왕 들어왔으니 어떻게든 버텨봐라. 여기는 버티는 것이 이기는 곳이야. 버틴다는 건 완생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우린 아직 다 미생이야.”

“성취동기가 분명한 사람은 토네이도와 같아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거나 피해를 주지. 하지만 그 중심은 고요하잖아. 중심을 차지해.”

 “자존심과 오기만으로 넘어설 수 없는 차이라는 건 분명 존재하니까요. 부끄럽지만 내일은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우리 모두에겐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

그의 키는 작다. 빛나는 눈을 가졌지만 그 눈이 빛나는 순간은 많지 않다. 현재는 막막하고 미래는 불안하다. “너의 뭘 팔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가 할 수 있는 답은 “노력”뿐이다.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임시완)는 오늘을 사는 우리와 닮았다.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지만 세상은 그런 노력 따위 알아주지 않는다. 재벌가의 숨겨둔 자식이거나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라면 좋았겠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그런 사람이기는커녕 그런 사람 가까이에도 가본 적 없다. 아마 평생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주어진 일들을 최선을 다해서 해내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상사의 불합리한 지시와 질책, 경쟁자들의 견제와 따돌림마저 묵묵히 견디는 수밖에 없다. 자꾸 작아지는 자신을 추스르며 오늘을 버텨야 내일을 맞을 수 있다.

 그 점에서 드라마 ‘미생’은 기존 드라마와 다르다. 기존의 드라마였다면 장그래의 동료 안영이(강소라)는 회장의 딸이었을 것이고, 장그래와 연애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다른 동료 장백기(강하늘)와 삼각관계를 형성할 것이고, 십중팔구 놀라운 능력과 품성의 소유자인 장그래가 사랑과 부를 쟁취하는 것으로 마무리됐을 것이다.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 캐릭터와 드라마 ‘미생’에서 장그래 역을 맡은 임시완.

 “미생은 그런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미생은 자질구레한 개개인의 노동을 자세히 보여주면서 ‘너의 노동엔 가치가 있다’고 말해줍니다.”

 만화평론가 박인하씨는 드라마 미생이 신드롬을 일으키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복사를 해오고, 팀장의 전화를 대신 받고, 영수증을 풀로 붙이고, 시간을 들여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하는 쓸모없어 보이는 순간이 모두 가치 있는 노동이라는 걸 일깨워 준다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 직장인들의 삶은 피곤하고 팍팍합니다. 경쟁은 심하고 비전은 보이지 않습니다. 미생은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갈증을 달래 줍니다. ‘공감의 힘’을 통해서입니다”라고 말했다.

 여리고 착해 이용만 당하는 박 대리(최귀화), 상사와의 불화로 승진에서 뒤처진 오 과장(이성민) 등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 주변의 인물들이다. 직장맘이라면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고 돌아서는 선 차장(신은정)의 “매일 이렇게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구나. 앞으론 너를 미루지 않을게”라는 대사에서 눈시울을 붉혔을 것이고, 회사가 지긋지긋하다면서 사직서를 품고 다니는 박 대리가 술에 취해 “나만 생각하라지만, 난 나만 생각할 수가 없어. 집이 힘들어”라고 한 독백이 마음에 와닿을 것이다.

 ‘미생’은 직장을 소재로 한 작품 가운데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작품이다. 과거 직장물은 대부분 극적인 성공담이나 직장을 배경으로 한 연애담이었다. 이종규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는 “미생은 직장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감정적인 공감을 이끌어 내고 있다”며 “만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 이 같은 신드롬을 일으킨 것은 영화 ‘공포의 외인구단’(1986년) 이후 처음인 것 같다”고 말했다.

 드라마 미생의 원작은 웹툰이다. 웹툰 미생은 2012년 1월부터 2013년 7월까지 인터넷포털 다음을 통해 연재되며 화제를 모았다. 당시 웹툰 독자인 20~30대 사이에서 인기를 끌며 조회수 10억 뷰를 기록했다. 만화책으로 출간된 미생도 100만 부의 판매기록을 세웠다. 올해 드라마로 제작된 미생은 전 연령대로 시청자층을 넓히며 미생 신드롬을 만들어가고 있다. 드라마를 보지 않는 이들도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공유되는 드라마 동영상이나 미생 어록을 퍼나르며 미생 신드롬을 확산시키는 중이다.

“드라마는 보지 않았지만 미생에 대해선 잘 알아요. 페이스북 지인들이 미생의 멋진 장면이나 대사를 많이 올려주거든요.” 올해 4년차 직장인인 문선영(27)씨는 드라마에 나왔던 인턴 사원들의 프레젠테이션 준비 과정을 보면서 ‘내 얘기 같다’고 느꼈다고 했다. 식품회사의 10년차 과장인 김봉민(38)씨는 “부하 직원의 공을 가로채는 상사 이야기에 공감했어요. 웹툰 미생 팬이었는데 드라마가 웹툰의 내용을 충실히 반영해 좋습니다 ”라고 말했다.

 통신회사에서 근무하면서 문화평론가로 활동해온 공희정(51)씨는 “드라마 미생을 보고 27년간의 직장생활을 접기로 결심했다”고 고백했다. 공씨는 지난달 31일 회사를 떠났다. 미생을 ‘내 인생의 드라마’라고 말하는 그는 “미생을 통해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돌아보게 됐어요. 의리파 오 과장처럼 살 것인지, 출세지향의 최 전무(이경영)처럼 살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누구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듯 자신의 삶은 자신이 선택하는 거니까요.”

 미생 신드롬은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 직장인의 팍팍한 삶을 돌아보는 계기도 되고 있다. 취업포털 ‘사람인’은 최근 조사대상 직장인 93%가 ‘아파도 출근한 경험이 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복지서비스 기업 ‘이지웰페어’는 직장인 절반 가까이(45.9%)가 노후의 경제적 빈곤을 가장 걱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부동산 서비스업체 알프렌파트너스는 직장인이 월급을 전혀 쓰지 않고 모아도 20평대 아파트를 구입하는 데 평균 13년이나 걸린다고 했다.

 한국고용안정원은 지난달 27일 취업자들이 직업안정성을 가장 중시하기 시작했다는 조사 결과를 밝혔다. 10년 전 취업자들이 가장 중시했던 가치는 성취였다. 이 조사를 한 고용정보원의 이효남 전임연구원은 “비정규직이 늘고, 40~50대 조기퇴직이 증가하 면서 구직자들이 과거보다 안정성을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고 분석 했다. 이와 함께 한국 직장인들의 일하는 시간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두 번째로 많다는 점도 부각되고 있다.

 미생의 작가 윤태호는 최근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미생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 “우리 아이들의 기댈 곳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잘못 살고 있지 않아. 그 애길 해주고 싶었다. 스스로를 배신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자아가 성취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생에 등장하는 오 과장은 후배를 감싸줄 줄 알며, 불의를 못 본 척하지 않는 인물이다. 일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이 넘치고 자존심도 강하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동료를 위해선 자신을 굽힐 줄도 안다. 성공하지 못해도 직장에서 잘나가지 못해도 존재만으로 위로가 되는 오 과장. 그런 사람은 우리 주변에 반드시 있다. 내세울 것 없고 미래도 불안하지만 하루하루 진심을 다해 살아가는 장그래. 그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일 것이다. 오 과장도, 장그래도 분명 잘못 살고 있지 않다.

[S BOX]『천하무적 홍대리』 『20세 재벌』 … 직장인 만화 계보

과거 직장을 소재로 한 드라마로는 1987년부터 93년까지 방영됐던 ‘TV손자병법’①이 대표적이다. 종합상사 진산그룹 자재과를 배경으로 만년과장 이장수와 대리급 직원인 유비·조조·장비·관우·여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였다. 직장인들의 애환을 코믹하게 다뤄 일명 ‘코믹 시추에이션 드라마’라고 불렸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고속성장의 경제환경 때문인지 가족드라마를 연상케 하는 훈훈한 내용이 많았다. 이 계보를 잇는 작품으로는 90년대 말 나온 만화 『천하무적 홍대리』② 와 『용하다 용해 무대리』가 있다. 샐러리맨들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다룬 코믹 만화였다. 주로 말단 직원들의 소시민적인 삶을 통해 독자들에게 페이소스를 느끼게 했다.

 이와 함께 강한 의지로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정상에 오르는 극적인 성공스토리가 인기를 끌었다. 80년대 박봉성 작가는 『20세 재벌』 『새벽을 여는 사람들』③ 등 기업만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90년대엔 허영만 작가가 『아스팔트의 사나이』④ 『미스터Q』 등을 발표했다. 대부분 전문직 종사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어려움을 뚫고 임무를 완수하는 내용이었다. 극적인 스토리 때문에 드라마로 만들어진 경우도 많았다.

박혜민 기자 acirf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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