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동포 명문가 부담? 스트레스 아닌 축복이죠…공부는 우리 집안 전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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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아릭 고는 고광림 박사 집안의 장남 고경주 전 미 보건부 차관보의 2남1녀 중 맏이다. 미들네임인 아릭은 레바논계 어머니 성(姓)에서 왔다. [안성식 기자]

재미동포 명문가 고(故) 고광림 박사 집안의 장손 스티븐 아릭 고(32·한국명 고원영)가 삼대째 법률가의 길을 걷게 됐다. 할아버지와 삼촌(고홍주 전 미 국무부 차관보)에 이어서다. 스티븐 고는 지난 8월 미국 연방검사에 임용됐다. 임용심사가 끝나면 법무부에서 국제 사법공조 업무를 맡게 된다. 그는 “국제법 전통이 내 피에 흐르는 모양”이라며 “장손으로 대를 이어 민주주의·인권·국제법에 기여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미국 하버드대·코넬대, 영국 케임브리지대를 나온 스티븐 고는 2010~13년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형사재판소(ICC)와 유고전범재판소(ICTY)에서 근무했다. 지난 8월까진 미 국제법학회(ASIL)에서 학술지 편집장을 맡았다. 서울대·경희대에서 강연을 하기 위해 지난달 말 한국을 찾은 그를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스티븐 고(왼쪽)가 2010년 할아버지 고향 제주 하귀1리 ‘고광림 박사 가족 현양비’ 앞에서 여동생 캐서린 고와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스티븐 고]

 -할아버지·할머니는 어떤 분인가.

 “할아버지(고광림 박사)는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하셨다. 국제법을 전공한 이유가 한국이 더 이상 외세에 침략받지 않도록 만들겠다는 취지였다고 한다. 자식들에게 하늘처럼 넓은 마음을 가지라고 가르치셨다. 할머니(전혜성 박사)는 재능보단 성격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식탁에선 늘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해 하고, 그걸 되돌려줘야 한다’는 내용의 기도를 하신다.”

 -어떻게 공부했나.

 “공부는 집안의 전통이다. 집에 일단 들어오면 책을 잡는 게 자연스러웠다. 공부가 즐거웠다. 아버지(고경주 전 미 보건부 차관보)는 내 첫 선생님이다. 나에게 읽기와 수학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열정을 갖고 공부할 대상을 찾아보라고 하셨다. 나는 국제법을 선택했다.”

 -한번이라도 부모 속을 썩여본 적 있나.

 “(한참 생각한 뒤) 사소한 게 있었다. 16세 때 처음 차를 몰았다. 아버지가 ‘오후 11시까지 돌아오라’고 하시길래 시간에 맞춰 귀가했다. 아버지는 좀 더 일찍 들어오길 바라셨다. 그래서 ‘첫 운전이라 원칙이 없었구나’라며 나와 상의해 귀가시간을 정하셨다. 아버지는 항상 원칙을 말씀하셨다. 원칙이 정해진 뒤론 나는 거기에 따랐다.”

 -명문가의 장손이라는 게 부담되지 않았나.

 “그런 질문 많이 받아봤다(웃음). 책임감을 느끼지만 스트레스라고 느껴본 적 없다. 고씨 가족의 일원인 게 축복이기 때문이다.”

 -왜 ICC와 ICTY에 지원했나.

 “국제법학도로서 국제 사법정의의 현실을 보고 싶었다. 어떤 평화도 정의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ICC와 ICTY가 완벽하진 않지만 국제 사회의 희망이다.”

 -한국에 대해 얼마만큼 아나.

 “2009년 서울에 머물면서 한국어를 배웠다. 한국 역사책을 읽었고, 할머니에게서 한국 역사를 배웠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게 자랑스럽다. 한국인은 강하다. 그래서 20세기 수많은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다. 고려의 불교, 조선의 유교, 광복 이후 서구적 가치 등 이 모든 게 요즘 한국에서 혼합됐다. 그래서 한국인은 역동적이다. 해외에서 한국 학생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한국적 가치관과 글로벌 마인드를 함께 가졌다. 또 매우 열정적이다. 그들에게서 내가 많이 배웠다.”

 -앞으로 계획은.

 “언젠가는 대학으로 돌아가고 싶다. 아버지와 삼촌은 교직과 공직을 통해 학문과 세상에 기여하는 모범을 보여주셨다. 나도 그 길을 따라가고 싶다.”

글=이철재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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