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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댓글 폭력'에 인생이 휘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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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대기업에 근무하며 야간대학을 다니던 김모(30)씨. 1년여간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진 뒤 주위 사람으로부터 "네가 그 녀석이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유명인이 됐다"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인터넷을 검색한 그는 크게 놀랐다. 남자친구에게 버림받은 여성이 자살했다는 소식과 함께 김씨의 주민등록번호와 휴대전화 번호, 사진이 게시돼 있었다. 한때 포털사이트에 김씨의 이름은 인기 검색어 1위에 올랐다. 근무하는 회사 홈페이지에는 김씨를 해임하지 않으면 제품 불매운동을 벌이겠다는 '네티즌 운동'이 벌어졌다. 5월 중순 그는 사표를 내야 했다.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비난하는 글이 쇄도하는데 방법이 없더군요."

2개월을 폐인처럼 생활하던 김씨는 지난달 말 N, E사 등 6개 포털업체에 "실명과 관련된 비방과 개인정보가 나타난 댓글 등을 삭제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틀 뒤 N사는 관련 게시물을 특정할 수 없으니 요청을 들어줄 수 없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E사는 "해당 게시물이 있는 인터넷주소를 적어보내면 검토하겠다"고 전화로 알려왔고, 나머지 업체는 회신조차 없었다.

체벌 교사의 자살을 책임지라는 네티즌의 비난을 참다못해 3월 가출한 공모(16)양의 경우도 익명의 횡포에 노출된 경우다. 공양의 어머니 정모씨는 "딸의 잘못이 아닌데도 무작정 매도하는 글들이 인터넷에 올라오자 이를 본 딸이 집을 뛰쳐나간 뒤 연락이 없다"고 울먹였다.

김씨와 정씨는 7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포털업체 6개 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겠다고 밝혔다.

포털 피해자 모임 변희재(31) 대표는 "센세이셔널한 내용의 댓글을 방치함으로써 포털업체는 방문자 수를 늘리고, 방문자가 늘면 광고단가를 높일 수 있게 된다"며 포털업체의 상업주의를 비판했다.

?"방문자 수 늘리려 방치"=김씨처럼 포털사이트에서 인기 검색어가 되면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네티즌들이 익명성을 무기로 의혹을 기정사실화하고, 이를 확대 재생산하는 댓글을 무더기로 올리기 때문이다.

명예훼손 등을 이유로 게시물을 삭제해 줄 것을 요청해도 포털업체들은 갖가지 이유를 내세워 거부하기 일쑤다. D사 관계자는 "1분에 수천 건씩 올라오는 내용을 관리하기 위해 직원을 더 늘리는 건 경영상 무리"라고 말했다.

N사는 유해 정보가 많다고 판단되는 게시판 등의 내용을 일단 보이지 않게 처리하고 나중에 당사자의 소명을 들어 삭제 여부를 결정하는 '블라인드' 제도를 운영 중이다. 하지만 명예훼손을 당했다는 당사자가 구체적으로 사이트를 지정해야 한다.

문병주 기자

사이버 명예훼손 책임
게시판 운용업체 '삭제 의무'
고의 방치 입증 땐 형사처벌

사이버 명예훼손에 대해 포털사이트 회사에 책임을 물을 수 있나….

피해자는 게시물 삭제 등 관리책임을 소홀히 한 것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탤런트 황수정씨는 NHN이 운영하는 '네이버 포토앨범'에 죄수복을 입은 자신의 사진과 마약 관련 패러디 사진이 게재되자 지난해 9월 1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이 사건은 현재 1심에 계류 중이다.

이날 기자회견을 한 김씨와 정씨를 대리하고 있는 정재욱 변호사는 "포털사이트들은 게시판.앨범 기능 등을 통해 재산상 이익을 얻기 때문에 명예훼손 게시물의 존재를 알고도 방치한 사실 등이 인정되면 민사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이버 명예훼손.성폭력 상담센터 유호경 센터장은 "'연예인 X-파일' 사건처럼 단기간에 게시물이 쏟아져 사실상 통제가 힘든 상황에서는 책임 인정 여부에 논란이 있을 수 있다"며 "그러나 피해자들의 소송은 포털사이트들의 주의를 환기시킨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판례는 온라인 서비스 제공자가 명예훼손의 우려가 있는 게시물을 삭제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2001년 대법원은 자신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을 방치한 통신업체 하이텔을 상대로 함모씨가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전자게시판을 설치, 운용하는 사업자는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이 게재된 것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던 경우 이를 삭제하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포털사이트의 대표자는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정보통신망법) 위반죄의 방조범으로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형사처벌은 '고의성'이 입증돼야 하기 때문에 민사소송에서 배상 판결을 받는 것보다 더 어렵다.

법원행정처 정보화담당관 백강진 판사는 "포털사이트들이 수사기관 등에서 해당 자료에 대해 삭제 경고를 받고도 방치한 경우 등이 아닌 이상 형사책임을 묻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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