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 칼럼] 프라하는 봄이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국경을 넘어 밤새 달려온 기차가 프라하 중앙역에 이르렀다. 카프카의 게토, 스메타나의 조국 체크에 도착한 것이다. 미명의 적막에서 나를 깨운 것은 작가와 음악가가 아니라 예전 체코슬로바키아 시절의 한 정치인과 한 경제학자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들을 불러낸 호출 부호는 단연 혁명이고, 그들 모두 혁명의 보헤미안이었다. 보헤미아는 기원전 이곳을 정복하고 다스린 민족으로 지금은 이 지역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 사회주의가 인간의 얼굴 가지면

프라하는 봄이었다. 1968년에는 '프라하의 봄'이 있었다. 서구에서 타오른 68혁명의 봉화는 부패한 자본주의 문명을 성토했고, 중국 대륙을 휩쓴 문화혁명은 주자(走資)로의 탈선을 고발했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경직된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과녁이었다. 카프카의 복권으로 개시된 60년대 해빙기에 작가 밀란 쿤데라, 영화감독 밀로시 포르만 등 문화계 지식인이 저항의 불씨를 지폈다.

불길은 공산당에서도 올랐는데, 47세로 제1서기에 오른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주역이었다. 그는 구체제를 개혁하고, 당과 사회의 민주화를 정력적으로 추진했다.

의회 제도 확립, 정당 정치 부활, 법에 의한 재판, 사전 검열 폐지 등 그의 민주주의 상식 실험을 흔히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문제는 '야수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의 역공이었다. 이해 8월 소련 탱크를 앞세운 바르샤바 동맹군 50만명이 체코슬로바키아에 진주했다.

프라하의 성지 바츨라프-영어로는 윈체슬라스-광장은 점령군과 시위대의 격돌로 피를 뿌렸고, 외국군 장갑차와 대포가 공산당 중앙위원회 청사를 겨눈 가운데 둡체크를 비롯한 개혁 지도부는 모스크바로 압송된다. 뒤따른 고문.투옥.유배.숙청 등 '사회 정화'의 미친 바람 속에 프라하의 봄은 여지없이 뭉개졌다.

프랑스의 코스타-가브라스 감독은 당시의 고통과 좌절을 영화 '고백'으로 만들었는데 취조가-배후의 권력이-얼마나 간악하며 사람의 육체가 얼마나 나약한 것인지를 현실보다도 '리얼한' 이브 몽탕의 연기로 모골이 송연하도록 그려냈다.

이해 11월 소련은 소위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천명한다. 한 사회주의 국가의 행동으로 주변국 생존이 위험할 경우 이를 사회주의 진영 전체의 위협으로 간주해 주권을 제한할-무력으로 개입할-권리가 있다는 희한한 주장이다.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를 '살해하고' 급조한 명분이었다. 프라하 시위대의 구호대로 "레닌이 깨어나 브레즈네프가 미쳐버린" 것일까?

이듬해 공산당에서 제명된 둡체크는 잠시 터키 대사로 유배됐다가 슬로바키아 지방의 산림 감시원으로 목숨을 부지한다. 새 권부는 반혁명을 물리치고 '정상화'를 되찾았다면서, 봄을 빼앗은 대신 빵을 늘리는 '실질적 사회주의' 건설을 약속했다.

자유란 참 묘한 것이어서 한번 맛들이면 좀처럼 끊기 어렵다. 바츨라프 하벨을 위시한 민주화 인사들은 작품과 무대에서 줄곧 프라하의 봄을 풀무질했고, 스웨덴 한림원은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줌으로써 잊혀진 봄에 대한 국제 사회의 관심과 연대를 부추겼다.

나치의 학생 학살 50주년 기념일을 맞아 대학이 휴업과 시위를 결정한 89년 11월 체코슬로바키아 민중은 공산당 체제에 전면전을 선포했다. 이에 극장들도 동조했는데 이것이 '벨벳 혁명'의 발단이었다.

혁명은 거리의 폭력이 아닌 극장의 우단 의자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벨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둡체크는 연방의회 의장으로 복귀했다. 봄에서 벨벳으로! 20년 방랑 끝의 멋진 복수였다.

*** 극장 의자에서 시작된 벨벳 혁명

프라하를 보려거든 동구의 물이 빠지기 전에 보라고 했다. 그러나 홈쇼핑 채널의 비만 치료제 선전에서 역전 광장의 섹스숍까지 도처에 서구의 물이 찰랑거렸다.

개나리와 진달래만 피라는 봄은 아니니까…. 체크의 젖줄 블타바-몰다우-강을 가로지르는 카를루프 모스트-찰스 브리지-는 정재와 미연의 10년 사랑이 이뤄지는 커피 광고의 배경이 된다.

둡체크의 공관은 지금 한국 대사의 관저로 쓰인다. 혹시 최고 권력자의 상징이나 흔적이 있더냐는 질문에 L대사는 "전혀 없어요. 검소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경제학자 얘기는 뒷날로 미뤄야겠다.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