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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뉴엘 6년 사기극 뒤엔 … 무보·수은 실적 경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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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만원짜리도 안 되는 전자제품을 250만원짜리 고가로 속여 3조원에 달하는 수출 실적 불리기. 산업·수출입은행은 물론 시중은행으로부터도 수천억 원대 대출을 마이너스통장에서 현금 빼 쓰듯 타내기. 영화 스팅처럼 엑스트라까지 동원해 은행 실사단 속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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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세청 등의 조사로 드러난 모뉴엘 사기 대출 사건의 전모다. 그런데 이 같은 행각이 어떻게 6년이 넘도록 한 차례도 포착되지 않았는지 금융계도 경악하고 있다. 그 이면엔 무역금융을 담당하는 무역보험공사(무보)와 수출입은행의 고질적인 ‘밥그릇 싸움’과 현실을 모르는 정부의 탁상 행정, 은행의 무사안일주의가 놓여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무보는 은행권 여신 가운데 2억8400만 달러(약 3000억원)를 보증했다. 수출입은행은 1135억원(잔액 기준) 전체가 신용대출이다. 두 기관은 각각 산업통상자원부와 기획재정부 소관이다. 금융위원회 관할인 기업은행(1508억), 산업은행(1253억원)의 대출 규모도 시중은행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다. 이번 사건의 핵심 고리는 무보가 모뉴엘의 수출채권에서 준 보증이다. 모뉴엘이 은행에서 받은 대출금을 떼먹어도 무보가 이 대출금을 전액 갚아준다. 이 때문에 은행으로선 대출금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상환 가능성은 있는지 따져볼 필요가 없었다.

 무보의 100% 보증은 신용보증기금이나 기술보증기금 등이 보증서를 발급할 때 전액이 아닌 부분 보증을 하는 것과 비교해도 지나치다는 지적이 나온다. 부분 보증은 대출이 부실화됐을 때 은행권도 책임을 분담하게 해 여신심사와 대출관리를 꼼꼼히 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무보측은 “수출업체와 금융기관을 연결해주는 특성상 100% 보증이 불가피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100% 보증을 내주면서 무보는 현장 검증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 공격적으로 바뀐 무보의 수출보증정책도 이번 사태에 한몫 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전까지만 해도 무보 수출보증을 받으려면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했다. 보증을 받으려는 업체가 외국의 수입업자와 짜고 허위 수출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단계 안전장치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보수적으로 보증을 해주다 보니 돈은 적게 떼였지만 무보 보증상품을 찾는 기업이 줄었다. “보증 문턱이 너무 높다”는 수출기업과 정치권의 반발도 잦았다. 결국 무보는 보증 자격을 크게 낮춰 고객을 모으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신용등급이 다소 낮거나 사업 경력이 길지 않아도 보증서를 선뜻 내줬다.

 보증 심사를 완화하자 무보의 건전성에는 ‘빨간 불’이 켜졌다. 지난해 금융당국은 산업통상자원부에 무역보험공사의 건전성 감독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수출 진흥에 목을 맨 산업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이후에도 별다른 조치는 없었다는 게 금융당국 관계자의 전언이다. 2011년 이후 무보의 보증배수는 90배 가까이로 치솟았다. 사고가 날 경우 무보가 지급해야 할 보험금액(유효계약액)이 기금총액의 90배에 달한다는 얘기다. 2007년만 해도 27.4배 수준이었다. 금융권 관계자는 “신보와 기보의 경우 보증배수가 15배만 되도 담당자들이 벌벌 떤다”면서 “하지만 무보는 산업부 관할이라 건전성보다는 무역진흥에 초점을 맞추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무보와 경쟁관계인 수출입은행도 사정도 다르지 않었다. 모뉴엘에 ‘히든챔피언’이란 타이틀을 부여한 데 이어 여신 전체를 담보 없이 100% 신용만 믿고 빌려줬다. 수은은 중소·중견기업에 대한 신용여신 비중을 2010년 94.3%에서 2012년 95%, 지난해 96.5% 등으로 늘리고 있다. 수은 관계자는 “ 대출을 늘리라는 정부의 요구와 기업들이 제일 마지막에 찾아와 대출을 받는 정책금융기관이다 보니 대출 비중이 늘어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책금융기관들이 이처럼 리스크 관리는 도외시한 채 실적에 목을 매는 건 때마다 제기되는 통합·개편론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덩치 불리기’의 성격이 짙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해 8월 정부는 관계부처 합동으로 정책금융역할 재정립 방안을 내놓으며 수출입은행과 무역보험공사,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의 중첩된 기능을 통합하려 시도했으나 결국 산은과 정책금융공사만 다시 합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각 기관을 관할하는 부처간 ‘밥그릇 싸움’이 조정을 어렵게 만든 주 요인이었다는 게 당시 관계자들의 말이었다. 2012년 말 기준 무보의 중장기수출보험과 중복되는 업무인 수은의 대외채무지급보증 잔액은 3조원(3.6%)이었다. 무보의 선적 전 수출신용보증은 신보·기보 보증과 중첩되는 대표적인 업무다.

세종=이태경 기자, 박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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