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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몽골과 다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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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는 역사상 두 번 점령당했다. 1258년 날랜 기병을 앞세운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는 20여 일간의 포위 끝에 바그다드에 입성했다. 2003년 첨단 정밀무기를 동원한 미국 주도 동맹군은 전쟁시작 19일 만에 바그다드를 함락했다.

약 750년의 시차가 있는 두 사건은 비슷한 점이 많다. 우선, 이라크군은 무력하게 무너졌다. 수도를 사수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도 발생하지 않았다. 또한 억압을 받아 오던 시아파 피지배층에게는 '해방전쟁'으로 받아들여졌다. 부패한 수니파 독재정권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압바스 왕조의 37대 칼리프 무으타심은 몽골군에 의해 살해됐다. 독재자 사담 후세인도 체포돼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전쟁 뒤의 상황은 상당히 다르다. 몽골군의 가혹한 점령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직적인 저항운동이 있었다는 기록은 거의 없다. 500여 년 역사의 이슬람제국이 이민족에 의해 무너졌지만 주민들은 점령군에 대한 저항에 열을 올리지 않았다.

반면 2003년 이라크전쟁 이후 저항세력의 반발은 끝이 없다. 전후 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매일 수십 명의 민간인.이라크군경.연합군이 목숨을 잃고 있다. 미군의 사망자 수도 이미 1750명을 넘어섰다.

왜 그럴까. 여러 해석이 있겠지만 이슬람 세계에 비친 몽골과 미국의 이미지가 크게 다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750여 년 전 이슬람 제국의 신민들에게 몽골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정보도 없었고 특별한 반감도 없었다. 몽골군은 오아시스를 무력으로 점령하려는 또 다른 경쟁자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오아시스를 놓고 부족.민족 간에 벌어지는 싸움은 중동에서 익숙한 전쟁이었다. 또한 몽골 점령세력은 이슬람 정복지에 자신들의 전통이나 가치를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몽골 군주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몽골전통법 대신 샤리아(이슬람법)를 받아들였다.

미국은 어떨까. 이라크뿐만 아니라 이슬람 세계가 보는 미국은 과거 몽골과는 상당히 다르다. 현재 이라크 및 중동의 과격 단체들은 미군을 '제2의 십자군'으로 규정한다. 이들은 미국이 수행하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을 '이슬람과의 전쟁'으로 받아들인다. 미국이 주창하는 '민주주의의 확산'은 기독교의 개인주의 가치관을 강요하려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미국이 취해 온 중동정책에 대한 정치적 반감에 이제는 종교적 반감까지 더해진 상황이다.

610년 메카 근교의 한 동굴에서 알라의 첫 계시를 받은 이슬람의 사도 무하마드가 무서워하며 찾아간 사람은 기독교인이었다. 인근 도시 메디나에서도 유대인들과 종교적 토론을 벌였다. 이후 유대교와 기독교의 '결함'을 보완하는 알라의 마지막 계시로써 이슬람 종교를 정립했다. 결국 이슬람은 기독교와 유대교를 뛰어넘어 완성된 종교로서 무슬림들에게 자리 잡았다. 따라서 유대교와 기독교 세력에 점령.지배당하는 것은 이슬람의 정체성을 뿌리째 흔드는 큰 위협으로 간주돼 왔다.

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까지 200여 년에 걸쳐 유럽 기독교 세력의 십자군 원정을 견뎌낸 힘도 여기서 나왔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에 맞서 미국 편에서 싸우던 중동의 무자히딘들이 91년 걸프전쟁 이후 갑자기 자세를 바꿔 대 서방 국제테러에 나선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슬람의 종주국 사우디아라비아에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중동 각국의 이슬람 과격세력이 친미 정권들에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시작한 것도 그 이후부터다.

현재 이라크 내 무장세력의 거센 저항은 이미 15년째 지속하고 있는 반미.반기독교 투쟁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슬람의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한 큰 전쟁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미국이 이제 이라크 사태를 서서히 정리할 때가 왔다는 지적이 계속 나오는 이유도 여기 있다. 완전한 승리를 위해서는 수백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끝없는 전쟁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정민 카이로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