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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가 출제하고 교사가 검토 … 오류 지적해도 묵살 일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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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김성훈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원장이 지난달 31일 세계지리 8번 문제 정답 오류 피해학생 구제책을 발표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뉴시스]

대형 사고가 일어나기 전엔 29개의 작은 사고, 300개의 사전 징후가 나타난다는 ‘하인리히 법칙’.

이 법칙에 따라 철저히 대비했다면 현 대학 1학년생이 치른 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세계지리 8번 문제의 오류도 사전에 막았을지 모른다.

1994년 첫 실시 이후 수능에선 2004학년도(언어)·2008학년도(물리2)·2010학년도(지구과학1)에 오류가 나왔고 그때마다 복수정답 처리됐다. 전직 수능 출제·검토위원들은 “수차례 오류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는 수능 출제 시스템 전반을 수술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수능은 출제위원이 낸 문제를 검토위원과 다른 과목 출제진이 수차례 검토하는 방식을 거쳐 출제한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수능 출제·검토위원단 구성 관련 규정에 따르면 출제위원의 75% 이상은 대학교수로 구성된다. 검토위원은 고교 교사가 다수다. 교수가 전문성을 살려 문제를 출제하고 현장을 잘 아는 교사가 검토하자는 취지다. 지난해 세계지리 과목은 4명의 출제위원 중 교수가 3명, 교사가 1명이었다. 검토위원은 6명 전원 교사였다.

 수능 검토위원으로 참여했던 한 교사는 “교수가 낸 문제 그대로 출제하면 오류와 뒤죽박죽인 난이도 때문에 나라가 뒤흔들릴 것”이라며 “검토위원의 지적을 출제위원이 묵살하는 경우가 있다. 세계지리 8번 문제도 검토 과정에서 오류 지적이 나왔지만 출제자가 ‘교과서에 있는 내용이다.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고 해 묵살됐다”고 말했다. 그는 “의견이 부딪칠 경우 평가원이 ‘교통정리’에 나서는데 출제 경험이 많은 교수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오류를 처음 지적한 박대훈 전 EBS 지리강사는 “평가원은 ‘수능은 교수 주축으로 만든다’는 원칙을 깨고 출제진의 교사 비중을 더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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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지리 등 선택과목일수록 서울대 지리교육과 같은 특정대 출신이 출제·검토위원을 독식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수능 출제위원으로 참여했던 한 대학교수는 “합숙에 들어갔더니 검토위원 5명 중 3명이 아는 사람이더라”며 “사제·선후배나 학회로 얽힌 경우가 많아 대면했을 때 오류를 지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비공개·서면 검토를 강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송호열 서원대 지리교육과 교수는 “‘수능 마피아’란 지적을 받지 않으려면 출제·검토위원의 풀부터 다양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평가원은 출제·검토위원이 편향됐다는 2011년 감사원 지적에 따라 특정대 출신이 50%를 넘지 않도록 운영해 왔다.

조용기 평가원 수능본부장은 “세계지리의 경우 출제진 4명 중 서울대 출신이 1명일 정도로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 다”며 “ 공정성 시비가 나오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겠다”고 말했다. 오류 시비가 불거졌을 때 평가원이 자문을 구하는 학회의 폐쇄성도 문제로 지적됐다.

이번 세계지리 문제의 경우 평가원 자문 요청을 받은 한국경제지리학회·한국지리환경교육학회 임원진이 요청을 받은 지 하루 만에 학회원들과 합의 없이 “문제에 이상 없다”는 결론을 냈다.

이정록(전남대 교수) 전 수능출제위원은 “자문이 학회 회원 전체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도록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수능의 자격고사화를 근본 해법으로 제시했다. 수능 한 문제로 대학 당락이 결정되는 바람에 치르는 사회적 비용이 크기 때문에 수능의 영향력을 축소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교총은 교육부가 피해학생 구제 방침을 밝힌 직후 성명에서 “절대평가 성격의 ‘국가기초학력평가’를 신설해 수능을 자격고사화하고 대입 제도를 내신 위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기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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