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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아의 지팡이」로 반평생|33년만에 한국 떠나는 「벽면의 모우숙 할머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몸은 떠나도 마음은 제2의 고향 한국과 몸이 불편한 손자·손녀들에게 두고 갑니다.』
장애자의 지팡이가 되어 반평생을 이 땅에서 봉사해온 벽안의 할머니 모우숙 선교사(66·본명「델머·모」)는 요즘 한 장 한 장 넘어가는 달력이 자꾸만 아쉽고 슬프게 느껴진다.
다음달 29일이면 검었던 머리에 하얀 눈이 내리도록 33년간을 정들었던 한국을 영원히 떠나야하기 때문이다.

<49년 33살때 첫발>
『할머니, 가지 마세요』- 모 할머니의 영구귀국 소식이 전해지자 근무처인 세브란스병원 재활의학과 의사·간호원은 말할 것도 없고 장애자 보호자들까지 하나같이 섭섭해 하고 있다.
모 여사가 한국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33년 전인 49년12월, 그의 나이 33세 때였다.
중국에서 의료선교활동을 벌이기 위해 2년 동안 중국어를 공부했던 모 여사가 한국을 찾은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미 캘리포니아주 버뮬리 대학에서 체육학을 전공, 로스앤젤레스 아동병원에서 물리치료 실습을 마치고 물리치료사 자격증을 획득한 모 여사는 아직 의료혜택을 재대로 받지 못하는 중국에서 봉사의 손길을 펴고 싶었다.
그러나 공산화된 중국에 입국이 불가능해지자 모 여사는 중동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에서 기회를 보기로 하고 6개월간 임시파견 형식으로 한국에 건너오게 된 것.
당시만 해도 재활의학분야가 거의 미개척 상태여서 모여 사는 것 부임지인 세브란스병원에서 병실을 돌며 물리치료가 필요한 환자를 찾아 혼자 힘으로 치료를 해야했다.
임시 파견으로 한국에 건너온 모 여사가 한국에 눌러앉게 된 계기는 6·25동란. 전쟁발발과 더불어 일본으로 피난했던 모 여사가 50년11월 귀국하자 곳곳에서 전상자와 고아들이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골절·척추손상·신체마비·반신불수환자에 대한 수술과 약물요법을 제외한 마사지·운동·전기치료·물리치료 등 물리적인 치료방법은 모두 모 여사의 영역이었다.

<물리치료 첫 도입>
6·25동란 중 전주예수병원근무 때는 전상자 치료와 함께 전쟁고아 보호사업도 펼쳐 당시 도움을 받았던 소년이 이젠 어엿한 성년이 되어 찾아오기도 한다.
52년7월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긴 모 여사는 처음으로 물리치료실을 개설, 본격적인 재활의술을 펴는 한편 전기·광선·물리치료에 필요한 시설을 들여왔다.
59년엔 감리교 선교재단의 도움으로 세브란스병원에 재활원을 설립, 소아마비와 뇌성마비 어린이를 본격적으로 치료하게 되었다.
물리치료분야에서 모 여사의 공격은 처음으로 물리치료사를 양성한 일 이외에 원주기독병원과 인천기독병원 등지에 물리치료실을 설치해 치료기술을 보급한 점에서도 두드러진다.
재활원 직원들은 모 여사가 사정이 어려운 환자를 찾아내 물침대·특수의자 등 희귀한 치료기재를 자신의 월급을 털어 사주면서도 전혀 생색을 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년 1년 연장도>
『일터가 있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어 일하다 보니 벌써 33년이 흘렀다』고 말하는 모 여사는 아직 독신.
일에 쫓기다보니 결혼할 시간도 없었다는 모 여사는 『얼굴이 미워 누가 데려가려 했겠느냐』고 농담하며 활짝 웃었다.
6·25동란 당시 포성에 놀란 충격으로 청력이 나빠지기 시작해 3년 전부터는 보청기를 사용해야 대화가 된다고 유창한 우리말로 설명했다.
모 여사는 그 동안 자신의 손길을 거쳐 쾌유한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지만 환자를 대할 때마다 항상 그들이 겪는 고통 앞에 자신까지 괴로와하게 된다고 했다.

<국민훈장도 받아>
『그 동안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지요. 휠체어를 타고 있는 저 어린것들이 다 내 손자·손녀예요.』모 선교사는 이미 우리네 할머니의 눈길과 말투가 되어있었다.
지난해 65세 정년을 맞아 귀국명령이 내렸으나 「장애자의 해」를 꼭 제2의 고향에서 보내고 싶어 귀국을 1년 늦췄다.
이제 영구귀국을 앞둔 모 할머니에게 정부는 장애자의 날을 맞아 20일 국민훈장목련장을 수여했다.
『과분해요. 하나님의 소명에 따랐을 뿐인데. 이 영광을 동료와 장애자들과 나누고 싶어요.』그 동안 김치와 불고기 등 한식에 입맛이 굳어졌다는 모 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꼬마들의 팔다리를 마사지하고 있었다.

<한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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