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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철근의 시시각각

히든챔피언의 몰락, 정책금융의 함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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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철근 기자 중앙일보 에디터
정철근
논설위원

히든챔피언(Hidden Champion). 독일의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이 만든 용어다. 세계시장 점유율이 높으면서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강소기업을 말한다. 1300여 개에 이르는 독일의 히든챔피언은 평균 2930억원을 수출하고 2000여 명을 고용한다. 독일을 수출대국으로 만든 일등공신인 셈이다.

 이명박 정부는 2011년 히든챔피언 육성 정책을 대대적으로 폈다. 가전업체인 모뉴엘은 첫해 히든챔피언으로 뽑혔다.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인 라스베이거스 CES에서 각종 상을 휩쓸었으니 당연한 선정으로 여겨졌다.

 이때부터 은행의 지원이 집중됐다. 수출입은행·산업은행·기업은행·국민은행·농협 등이 줄줄이 대출을 해줬다. 정부가 보증한다는데 꺼릴 이유가 없었다. 회사는 히든챔피언이 된 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선정 당시 2953억원에 불과하던 매출이 지난해 1조2737억원으로 뛰었다. 박홍석 대표는 성공한 벤처 기업인으로 떠올랐다. 그는 지난해 현금배당 66억원을 챙겼다. 회사 돈으로 산 서울 청담동의 국내 최고가 아파트에 살았다. 그런데 우리은행의 대출 담당자는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그는 매출액 중 외상(매출채권)의 비중이 너무 높다는 점에 주목하고 실사를 요구했다. 그러나 모뉴엘은 꺼려 했다. 결국 우리은행은 대출 850억원을 모두 회수했다.

 신한은행도 모뉴엘의 해외판매 파트너인 미국 A사의 홈페이지를 검색하다 이 회사 제품이 많이 팔린 증거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은행 역시 대출을 거둬들였다. 이젠 거의 다 까먹은 중급회계 지식을 떠올려 모뉴엘의 재무제표를 뜯어봤다. 대차대조표·손익계산서를 보면 초우량기업이었다. 문제점은 현금흐름표에서 발견됐다. 해외 매출채권은 대개 60일, 늦어도 90일 안엔 현금으로 입금돼야 한다. 적어도 수천억원의 현금이 들어와야 하는데 이 회사의 지난해 영업활동으로 인한 현금 유입액은 오히려 마이너스 15억원이었다. 또 1조원 넘는 매출을 올리는 제조업체인데 제대로 된 공장이 없었다. 홍보 블로그에 나오는 로봇청소기 공장을 보면 영세 하청공장 수준이다. 결국 휴지조각이나 다름 없는 매출채권을 담보로 거액을 꿔준 셈이다. 모뉴엘이 법정관리를 신청하자 뒤늦게 금융감독원이 조사에 나섰다. 앞서 지난 9월 관세청이 내부 제보를 받아 사기 혐의로 압수수색까지 했지만 금감원이나 대출 은행과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다. 검찰도 수사에 착수했다. 국책은행이 개입했으니 감사원도 감사에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장면이다. 그렇다. 우리는 김대중 정권 때 부실 벤처금융으로 인한 엄청난 국가적 손실을 경험했다. 기술신용보증기금이 2001년 벤처산업을 지원한다며 2조2122억원의 프라이머리CBO를 보증해 무려 1조원의 피해를 봤다. 당시 벤처를 빙자한 일부 사기꾼은 보증지원 자금으로 부동산 투기를 하거나 골프장 회원권을 샀다.

 정권마다 경제를 살리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김대중 정부는 벤처, 이명박 정부는 녹색경제,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를 화두로 삼았다. 그 이름으로 대규모 정책금융이 생겨났다. 성공 사례도 있지만 실패 비율이 적지 않았다. 금융의 시각에서 적정성·효율성을 따져야 하는데 관료적 시각에서 목표를 정해놓고 밀어붙이기식 지원을 했기 때문이다. 감사원의 2005년 벤처 금융 감사보고서에서 지적한 부실한 선정, 허술한 사후관리가 이번에도 되풀이됐다. 히든챔피언을 선정하는 담당인력은 3명, 사후관리 인력은 4명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실사는커녕 자료 분석도 꼼꼼히 이뤄질 리 없다. 지금까지 히든챔피언으로 선정된 기업은 267개. 이 중 93개 기업이 선정 전보다 오히려 매출이 떨어졌다.

 기업의 최고재무책임자(CFO)인 친구는 모뉴엘 사태를 이렇게 평했다.

 “만약 사모펀드나 증권회사가 모뉴엘을 분석했다면 투자를 안 했을 것이다. 물린 금융기관들을 봐라. 외국계 금융사나 사모펀드가 있는가. 결국 기업 현장을 모르면서 정부정책을 따라간 국내 은행들만 당한 것이다.”

정철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