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트최후의회고록 제2부 『내가 알고있는것들』<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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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나는 왜 아랍세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선택했는가-. 뒤에 캠프데이비드평화협정이라고 불려지는 이스라엘과의 화해조치를 추구하게된 내 심경의 일단을 밝히고자 한다.
내가 중동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이니셔티브를 취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아랍측이 새로운 스타일을 택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만해도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자국민은 물론이고 전세계의 시온주의단체들로 하여금 아랍을 거부하게끔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국민들의 마음속에 이스라엘과 아랍세계는 평화공존의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주입시켜왔다.
그들은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국민들을 바닷속으로 쓸어넣어 버리려고하는 괴물쯤으로 묘사해왔다. 그들은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언론에 비친 구호나 기사내용을 이용하여 반아랍캠페인을 벌였고 아랍국가들과는 평화공존의 희망이 없음을 강조해왔다.

<산유국만 어부지리>
그러나 나의 이니셔티브가 있은 뒤 이스라엘 국민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볼수없었던 새로운 스타일의 아랍상을 발견하게됐다. 이같은 깨달음은 나의 이니셔티브에 대한 그들의 반응에 그대로 드러났다.
반아랍캠페인에 오랫동안 젖어온 만큼, 이스라엘국민들이 나의 평화이니셔티브에 보인 반응은 매우 강한 것이었다.
그이전까지 이스라엘인들은 말로는 평화릍 외쳤지만 전쟁을 일으켰고, 아랍인들은 반대로 전쟁을 부르짖으면서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않았다. 그래서 중동의 정국은 항상 불안정했다.
나의 평화이니셔티브가 있은뒤 상황은 달라졌다.
이스라엘국민들은 아랍세계의 새로운 태도에 감명을 받아 평화를 위한 압력단체의 역할을 하게됐다. 그와동시에 이스라엘정부와 이스라엘지도자들의 생각도 변화를 보였다. 그들은 아랍의 평화 이니셔티브가 중동에 평화를 정착시킬 기회이며 나의 평화추구행동은 그들이 생각하듯 아랍국민들이 그토록 나쁜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나의 평화 이니셔티브는 이스라엘의 여론에 이렇듯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다.
이집트가 겪은 전쟁의 공포·학살·파괴·발전의 지연등을 돌이켜보면 이집트는 『전쟁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구호로 인해 퇴보했다고 할 수 있다. 전쟁으로 수백만달러의 재산을 잃고 패전이 안져준 심리적 좌절감에서 나는 평화를 선택했다. 나는 이집트에 평화가 절실한 것이며 평화없이는 이집트는 전쟁도 평화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으로 되돌아 갈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집트가 너무 늦기전에 21세기에는 번영의 동반자가 될수있도록 국가를 발전시킬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이 나로하여금 평화이니셔티브를 취하게했고,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하도록 했다.
내가 평화를 유지함으로써 우리가 많은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것은 무슨 까닭에서였던가. 그 설명은 간단하다.

<소의도움도 기대난>
1948년이후 이집트와 아랍국가들이 전쟁에 쏟아부은 돈은 어마어마한 액수다. 73년의 10월전쟁(4차중동전)까지 전쟁 손실의 99%는 이집트가 입은 것이었다. 설사 그손실이 99%에 이르지 않고 75%이하였다고 하더라도 이집트에는 큰 부담이었다.
특히 10월전쟁이후 다른 아랍국들은 석유로 많은 돈을 벌었다. 석유무기화의 계기가되었던 4차중동전은 아랍국가들에 큰 부를 안겨준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이집트는 자원이 고갈되고 어려운 문제만 쌓여갔다.
중동평화협상과정에서 이스라엘의 문제제기로 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질 양이면 나는 이집트의 전쟁피해를 생각했다. 10월전쟁의 직접이득(정신적 승리감과 자신감을 주었던것은 의의가 컸지만)은 무엇이었던가. 우리가 시나이반도에서 얻은것도 아주 사소하지 않았던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이스라엘이 일을 어렵게 만들었을때도 나의 평화의지를 포기하지않았다.
그동안 이집트의 전비부담은 1백40억파운드(18조원)나 되었다. 이 엄청난 액수는 우리의 파괴손실을 포함시킨것이 아니다.
우리가 평화 이니셔티브로 얻을수 있었던것을 전쟁으로 성취하고자 했다면 그것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10월전쟁에서 보았듯 미국은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 지원했는데, 우리 이집트는 미국과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었다. 반면에 소련은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한 것처럼 아랍 국가와 손잡고 전쟁을 수행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있었다.
내가 시나이반도의 나머지 부분을 되찾기위해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는 모험을 감행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때문이었다.
만약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면 이집트는 1백년을 퇴보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집트의 최고통치자로서 항상 신과 국민앞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다른 아랍의 지도자들처럼 구호나 외쳐대고 국민을 파멸로 이끌어가는 영웅 노릇을 하기는 쉬운 일이지만, 나는 결코 그럴수는 없었다.
따라서 나는 평화를 통해서 같은 목표를 성취할수 있다고 굳게 믿고 평화의 길을 선택했으며, 국민을 전쟁으로 이끌지 않았던 것이다.
캠프데이비드협정을 체결할 때까지 나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접촉했다. 나는 감히 그들중 몇번 인물에 대한 촌평을 하고자한다.
「카터」미국대통령은 원칙에 충실한 인물이고, 이런 사람은 같은 부류의 사람과만 대화가 통한다.
「카터」 같은 사람이 원칙을 무시하는 「브레즈네프」와 같은 인물과 협상을 한다면 타당한 해결책이 나오기가 어려울 것이다.
「카터」는 원칙과 이상을 추구하는 인물이고, 소련은 이상주의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협상을 한다해도 어느 한쪽이 상대방을 속이기 일쑤일 것이다. 「사이러스·밴스」미국무장관은 신사이기때문에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없다.
이스라엘의 총선거기간중 모든 여론조사결과는 「시몬·페레스」노동당당수가 승리할 것으로 나타났다. 나는 평소에 「벤·구리온」「골다·메이어」「베긴」등 세사람중 어느 한사람이 이집트와의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있다고 믿어왔다.

<처음엔 베긴못믿어>
나는 「벤·구리온」이나 「골다·메이어」가 이스라엘에서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있는 지도자로서 이집트와의 평화협상을 추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나 「베긴」은 그렇지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평화조약에 서명한 것은 「베긴」과 함께였다.
「페레스」는 신의를 지키고 상황을 파국으로 이끄는 행동을 하지않는 사람이기때문에 그가 선거에서 승리했다면 나는 그와 협상할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이스라엘 노동당은 평화협상 과정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페레스」와의 협상이 한결 쉬울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베긴」 역시 강력한 지도자였기때문에 그와 협상하는것은 좋은일이었다. 지도력이 미약한 지도자는 협정을 깨뜨릴수도있기 때문이다.
이란=이스라엘간의 분쟁해결에 올바른 길을 선택한 이집트는 정책을 상대국의 어떤 개인에 입각해 세우지는 않았다. 상대국에서 누가 정부를 책임지든 이집트는 자신의 정책을 선택할 정치적 의지를 가지고 있다.

<편집자주=「사다트」회고록 2부에 나타난 캠프데이비드 평화협정에 관한 부분은 상기한 것이 전부다. 그러나 회고록 판권을 가지고 있는 뉴욕 타임즈 신디케이션측은 고 「사다트」대통령이 평화협정 체결의 배경·협상·조문작성등 모든 과점을 소상하게 구술했을 것으로 믿고있으나 이집트측이 여러가지 정치적 이유로 아직 공개를 꺼리고 있는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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