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원유시장의 카니발 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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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가가 임계점에 이르렀다.

28일 시간 외 거래에서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WT) 값이 배럴당 80.5달러까지 내렸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적정 원유가는 배럴당 105달러 선이다. 현재 원유 값은 OPEC 회원국들의 적정 가격보다 23.8% 정도 낮다.

유가 하락은 여기서 그치지 않을 전망이다. 27일(현지시간) 미국 최대 투자은행 골드먼삭스가“내년에 유가는 배럴당 70달러 선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예측했다.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 때문이다. 글로벌 경기 둔화로 석유 소비는 주는 데 셰일가스와 신재생에너지 등을 포함한 에너지 공급은 그대로이거나 더 늘어난다는 얘기다.

블룸버그 통신은 이날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원유 수출국, 특히 OPEC 회원국들이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고 전했다. 생산량을 줄여 기름값 하락을 막을 것인가 아니면 가격 하락을 감수하더라도 수출량을 유지할 것인가.

현재 OPEC 회원국들은 자신들이 정한 생산 한도도 지키지 않고 있다. 이달 들어 OPEC의 하루 생산 한도는 3000만 배럴이었다. 그런데 최근 OPEC 하루 생산량은 3100만 배럴 정도로 늘었다. 로이터 통신은 “요즘 OPEC 회원국들이 발칸반도처럼 분열돼 있다”며 “여차하면 상대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는 태세”라고 비유했다. 회원국별 생산쿼터를 어기고 원유 생산량을 늘리는 행위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카니발 현상(Cannibalization, 동종살해 또는 제 살 깎아먹기)’이다. 각자의 생존을 위해 같은 편을 죽인다는 얘기다.

이런 와중에 세계의 눈은 다음달 27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릴 OPEC회원국 석유장관 회동에 쏠릴 전망이다. 회동의 주인공은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 아라비아의 에너지 장관인 알리 알나이미(79)다. 그가 회원국들의 이해를 조정해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블룸버그 등은 “사우디는 자국뿐 아니라 걸프지역 왕국에 뭉칫돈을 지원하고 있다”며 “이런 자금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생산량을 줄이기보다는 수출 점유율을 유지하려고 한다”고 전했다.

여기에다 과거의 경험도 사우디의 행보에 영향을 줄 전망이다. 1980년대 북해 유전이 발견된 뒤 유가가 급락하자 85년 사우디는 일일 원유 생산량을 75%나 줄이며 가격 지지에 나섰다. 하지만 가격은 더 떨어졌고 사우디는 16년간 재정적자에 시달렸다.

유가를 떨어뜨림으로써 잠재적 경쟁국인 미국과 현재의 경쟁국인 러시아 등을 함께 견제하는 효과도 있다. 미국의 셰일 가스는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신경 쓰이는 존재다. 유가가 낮아지면 미국은 셰일 가스를 개발할 필요성이 준다. 이와 함께 저유가는 주요 석유수출국이자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러시아와 이란을 압박하는 효과도 있어서다. 80년대 중반에도 사우디가 주도한 저유가 정책은 소련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86년 사우디가 하루 산유량을 200만 배럴에서 1000만 배럴로 늘리자 유가는 배럴당 10~20달러까지 떨어졌고, 이는 소련의 몰락을 부채질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빈 회동에서 카니발 현상은 해결되기 어려워 보인다. 골드먼삭스는 “내년에 원유 하루 생산량을 80만 배럴 정도 줄여야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규모는 전세계 하루 수요(8000만 배럴)의 1% 정도다. 하지만 OPEC 회원국뿐 아니라 러시아 등 비 OPEC 멤버들까지 참여한 대타협이 이루어질 확률은 극히 낮다. 블룸버그는 “현재 상황에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라고 보도했다.

국제 유가 하락은 국내에 적잖은 파장을 낳고 있다. 국내 보통휘발유 값(오피넷 주유소 평균 판매가격, 부가세 포함 기준)은 이달 초 1800원대가 깨졌다. 매주 1~2원씩 떨어졌다. 27일치는 1763.15원이었다. 올 최저 가격이다. 경기 둔화시기에 저유가는 전반적으로 긍정적이기는 하다. 하지만 저물가 증상이 나타나는 와중에 기름값 하락이 반가운 일만은 아니다.

국내 정유업계는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장우석 SK에너지 경영기획실장은 28일 3분기 실적발표(컨퍼런스콜)에서 “두바이유 값이 배럴당 80달러 정도까지 떨어지면 정제업자들이 손익분기점을 맞추기 어렵다”고 말했다.

강남규·이현택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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