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2)|제76화 화맥인맥 월전 장우성(81)|미국서의 생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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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내가 워싱턴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수화 (김환기)에게서 편지한통이 날아들었다.
발신인 주소가 뉴욕으로 되어있어서 깜짝 놀랐다.
편지를 뜯어보니 내가 미국으로 떠난 후 자신도 홍대미술대학장 자리를 내놓고 사웅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대표로 참가했다가 그 여권을 가지고 그냥 뉴욕에 주저앉았다고 씌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금방 뉴욕으로 달려갔다.
수화가 편지에 쓴 주소 (월라드330 웨스트 앤드 애비뉴)대로 찾아갔다.
수화 방에 들어가기 전에 구멍가게에서6병씩 묶어놓은 캔맥주를 두박스 사 가지고 올라갔다.
수화가 깜짝 반가와 어쩔 줄 몰라했다. 깡통맥주를 따 마시며 회포를 풀었다. 고국 이야기랑 미국생활 이야기를 나누며 오랜만에 술을 흠뻑 마셨다.
수화와 미국에서의 해후(해후)는 인정에 그리운 내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었다.
워싱턴에 살면서도 짬만 나면 뉴욕으로 달려가 수화를 만났다.
꼭대기까지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 구겐하임 미술관이며 뉴욕 현대미술관등을 수화와 같이 구경했다.
만날 때마다 화는 고국에 가고싶다고 향수어린 이야기를 했다.
그럴 때 마다 나도『못 견뎌서 그러지 말고 서울로 가자』고 부추겼다.
사실 그때는 나도 향수병에 걸려 있을 때였다.
이 무렵 나는 수화나 양화가 김훈를 만나는게 유일한 낙이었다.
김훈씨도 뉴욕에서 살았는데 부인이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에 혼자 외롭게 지내기가 일쑤였다.
어쩌다 내가 찾아가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둘이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국수를 끓여 먹었다.
내가 워싱턴에 있을 때 현 초 (이유태)가 세계일주여행 중에 잠깐 들러 며칠동안 즐겁게 지냈다.
하루는 밖에 나갔다 들어와 막 문을 들어서는데 현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디냐고 물었더니 피츠버그라고 했다.
내일 워싱턴에 도착하는데 공항서 만났으면 좋겠다고 연락이 와서 호텔을 잡아놓고 시간에 맞춰 공항에 나갔다. 현초는 워싱턴서 미술관도 돌아보고 2, 3일 잘 놀다가 뉴욕으로 떠났다.
뉴욕에 갈 때도 내가 수화에게 연락, 안내 좀 해주도록 부탁했다.
나중에 수화가 급한 일이 생겨 그의 부인 김향안 여사를 그레이하운드 터미널까지 대신 내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번은 삼환기업사장 이종진씨가 미국 출장 중에 내게 들러 나를 호강시켜줬다. 이사장은 내가 그림공부를 시킨 이완수군의 아버지여서 오래 전부터 잘 아는 터였다.
이사장에게서 고국의 이야기를 들으니 문득 같이 가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워싱턴 체재 중에는 양유찬 순회대사도 만나고 박동선씨가 베푸는 파티에도 몇 번 참석했었다.
박씨가 나를 미국 국회의원들에게 소개, 그들과 인사를 나눴다.
박씨는 당시 워싱턴 교포사회에서 영어를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있었다.
내가 워싱턴에서 동양예술학교를 운영하고 있을 때는 이승만박사 친구라는 김용중 씨가 찾아왔다.
김용중 씨는 백악관 앞에서 1인 데모로 한국정치현실을 비판하고 워싱턴 포스트에도 거론되던 사람이어서 나도 성명3자는 익히 알고 있었다.
한국신문에도 친구인 이승만박사를 몰아 세우는 기사에『김용중 왈』하고 워싱턴지로 보도되기도 했었다.
이런 그가 내게 와서 좀 이상하게 여겨졌지만 몇 번 만나보니 별문제가 없는 분이었다.
김씨는『본국에서 유명한 화가가 와 예술학교를 냈다』고 해서 인간적인 교류를 갖고싶어서 찾아왔다고 실토했다.
김씨는 이미 나이가 들어 고독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내 아파트에도 찾아오고 그가 집에 초대해 몇 차례 놀러 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의 집에 굵은 대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던 게 퍽 인상적이었다.
나는 미국에 있을 매 워싱턴 한인 회장을 하던 최제창박사(내과의사)를 주치의로 삼고 있었다. 집이 너무 멀어 나중에는 미국인「시술린」(내과의사)으로 홈 닥터를 바꾸었는데 어느 핸가는 크리스머스 이브에「프레시」제독 집에 초대, 칠면조 고기를 먹고 배탈이나 혼 이 났다.
별 이상이 없이 집까지 무사히 돌아왔는데 이튿날에야 배가 뒤틀리고 얼굴이 창백해져 방안을 헤맸다. 마침 김정현씨가 우리 아파트에 들렀다가 이 꼴을 보고「시술린」에게 전화, 그의 지시를 받아 워싱턴 종합병원에 입원했다.
「시슬린」이 종합병원까지 찾아와 담당의사와 의논해 치료해줬다. 그때는 보험에 들지 않아 치료비 6백 달러를 세번에 나누어 내느라 큰 고생을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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