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 등단 3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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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만난 오누이 같다. 활짝 웃는 모양이 그들이 써온 시처럼 곱다. 송봉근 기자

아마도 버거운가 보다. 우리네 삶, 참으로 무거운가 보다. 그래서인가. 이 시대 가장 많이 읽히는 시는 부산의 한 수녀님 말씀이시다(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이후 이해인 수녀의 저작은 통틀어 500만 부 이상 판매됐다). 정호승 시인이 부산에 내려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해인 수녀를 만나기위해서란다. 듣건대, 둘의 우정은 20년도 한참 지났다. 둘의 시 세계가 많이 닮아서일 게다. 그래도 부산이면 먼 길인데 어인 행차냐 물었더니, "며칠 전
수녀님이 이순이 됐다"며 "마침 첫 시집이 30년 전에 나왔고 수녀회 입회도 올해로 40년째"라고 설명한다. 시인 따라 얼른 행장을 꾸렸다.

5분만 걸어 나오면 광안리 바닷가. 여기에 이해인 수녀의 보금자리 성 베네딕도 수녀원이 있다. 수녀회 입회 이후 학업과 파견 등으로 나가 있던 10여 년을 빼곤 그는 줄곧 이 곳을 뜨지 않았다.

이해인 수녀는 우체국을 막 다녀온 길이었다. 우체국은 그가 정기적으로 들르는 곳이다. 하루에도 수십 통 그에겐 편지가 날아온다. 그 안에 갖가지 사연이 다 들어있다. 탈옥수 신창원의 것도 있고, 서진룸살롱 사건 주동자의 것도 있고, 지난해 수해로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것도 있다. 편지는 무턱대고 보내는 것이다. 답장을 기대해서라기 보단 이해인 수녀에게 보내기 위해 쓴 편지다. 멀찍이서 생각하는 것만으로 이해인 수녀는 이미 위안을 주는 존재인가 보다.

정호승 시인=바쁘실 텐데 또 답장을 하셨나 봅니다.

이해인 수녀=아니, 다 못 썼어요. 사연이 급하다 싶은 것만 먼저 보내거든요. 어떤 답장은 일년 뒤에 보낸 것도 있어요(그는 나중에 지난 2년간 1000통이 넘는 답장을 썼다고 덧붙였다). 그건 그렇고 또 내려왔어요? 시인께서 제가 숨을 수 있도록 도와주셔야지요! 참….

수녀의 웃음은 여전히 맑고 고왔다. 시인 또한 웃음으로 답한다.

수녀=그렇지 않아도 요즘 신경 쓸 일이 많아요. 손님이 제법 많아 은근히 눈치도 보이는데, 애써 찾아오신 손님 그냥 돌려보낼 순 없는 노릇이고. 아, 정호승씨 두고 하는 말이 아니랍니다. 수녀님들이 정호승 시인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실제로 수녀원에 머무는 동안 젊은 수녀 몇몇이 수줍게 사인을 부탁해왔다).

시인=많이 바쁘시지요? 행사도 여럿이고, 편지도 써야 하고. 시는 좀 쓰십니까.

수녀=마음같이 시를 도통 못 쓰는 편이지요. 마음의 샘에 고여있는 것들을 여유롭게 다듬을 시간이 필요한데 요즘 제가 그렇지 못 하답니다. 제가 맺고 끊는 게 분명치 못한 탓이겠지요. 항상 반성하며 살고 있습니다(어렸을 때부터 문학이 좋아 시를 쓴 것일 뿐인데 어느 날 그는 국내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돼 있었다. 그 사실이 수녀의 신분으로 적이 부담스러워 보였다).

시인=시를 못 쓰니 속상하시겠습니다.

수녀=편지 쓰기, 축시.추모시.추천사 쓰기 같은 여러 심부름으로 창작 시간을 놓치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사랑의 실천'이라고 여기면 평화가 옵니다. 저를 오해하시는 분들도 계신 것 같던데 이만큼 나이 들고 보니 오해받는 일도 나름대로 필요한 일이겠거니 합니다. 여유가 생긴 것이겠지요.

시인=그런 말씀 마십시오. 수녀님의 시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위안을 얻는데 그러십니까.

수녀=선생님께서 저에게 위안을 주시는군요. 공동체가 제 글방으로 배려해 준 이 공간도 '작은 위로'라 부르지요. 정 시인도 언젠가 '위로'라는 책을 낸 적 있지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겐 모두 위로가 절실한가 봅니다.

이해인 수녀의 시는 기도의 시다. 늘 기도하라 당부한다. "기도야말로 우리가 알고 있는 마지막 위안의 몸짓"이기 때문이란다. 하여 그에게 기도는 '음악이자 성스러운 깃발'(시 '민들레의 영토'에서)이다.

세상은 그에게 위안을 기대한다. 본인은 손사래를 치지만 세상은 그의 시에서 구원을 읽는다. 그가 답장을 보내고 환히 웃는 것만으로 우리는 힘을 얻는다. 기도는 위안이고 위안은 바로 시일진대, 바빠서 시를 못 쓴다는 그의 말이 자꾸 걸린다. 우리네 삶은 아직도 고단하다.

부산=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bks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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