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제삼공화국<31>『국가재건 최고회의』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최고회의는 방대한 권력기반 위에 섰다. 어느 곳의 통제도 받음이 없이 입법과 행정권을 장악했고 혁명재판을 통해 사법권의 일부도 행사했다. 그러나 역시 군정이라는 데서 그 성격은 과도적일 수밖에 없었고 기간조차 불확실하다는데서 보면 안정된 통치체제라고는 하기 어려웠다.
국민들은 개혁의 욕구 못지 않게 민정이양에 관한 궁금증을 감추고 있었다.
「조속한 민정이양」이 공약이기는 했으나 초기엔 누구도 군정기간을 고려하지 않았다. 일부는 조속한 이양을 대세라고 봤지만 다른 일부는 충분한 기간 그리고 가능하다면 민정까지는 맡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런 차이 속에서도 일치된 것은 국정의 수술과 혁명업적에 대한 과잉의욕이었다.
이런 분위기가 최고회의로 하여금 정치를 서두르게 만들었다.
최고회의의 의욕을 구체화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 전문지식을 가진 두뇌들을 징발한 「국가기획위원회」였다.
이 같은 발상에서 최고회의는 그 산하에 기획위원회를 설치했다.

<유진오씨 등 고문에>
국방대학원장 함병선 중장을 위원장으로 5개 분과위별로 구성된 기획위는 각 분과별로 대령급이 책임자가 되어 대학교수·연구기관 종사자·기타 관계전문가 62명을 분과위원으로 위촉했다. 총 참여인사는 4백 70여명.
기획위원장 아래 4명의 대령으로 구성된 최종 심의위원과 6명의 고문을 두었다.
최고회의 의장고문 6명과는 별도로 위촉된 기획위원장 고문에는 당시 고대총장이던 유진오씨가 「최고 고문」으로, 그 밖에 최호진(중앙대) 이용희(서울대) 김석범(예비역 해병중장) 오종식(서울신문 사장) 서석순(연대)씨 등.
5개 분과위별로 위촉된 저명인사는 ▲정치분료위=윤천왕 조순승 오병헌 이원우 백상건 김운태 ▲경제분과위=석병준 나익종 주석균 조기준 탁희준 이활 이은복 ▲사회·문화분과위=이해영 김두종 김기석 정범모 왕학수 이정직 박종홍 ▲재건·기획분과위=이균상 현신규 심종섭 주원 안경모 정재석 이기홍 이만갑 김영준 강병규 ▲법률분과위=이종극 김백한 박일경 박원선 이건호씨 등이었다.
기획위원회의 각 분과 위원장을 맡았던 대령들은 대부분 국방대학원에서 강의를 맡고있던 엘리트장교들이었고 비단 분과위원장뿐 아니라 이곳에 파견된 현역장교들 대부분이 국방대학원에서 많이 차출됐었다. 교수들 중에도 상당수는 국방대학원에서 강의를 했거나 하고있던 사람이 많았다. 다음은 당시 분과위원으로 위촉됐던 전직 교수 A씨의 증언.
『5월말로 기억됩니다. 젊은 장교가 강의실로 불쑥 들어오더니 「교수님 같이 가셔야겠읍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지금 강의 중이니 끝나면 가자」고 했지만 당장 가야한다고 우겨 강의 중간에 나왔어요.
당시 대학가는 황모·이모 교수 등이 구속된 상태여서 매우 술렁이고 있었기 때문에 잡으러 온 것이 아닌가하여 불안했던 게 사실입니다.
군대 지프를 타고 도착한 곳이 퇴계로에 있는 구 참의원 의사당 앞이었어요. 「국가기획위원회」라는 간판이 붙어있더군요.
육군대장이 나오더니 「교수님, 혁명정부에 협력해주셔야 하겠읍니다」라고 합디다.
이 때부터 기획위원회 일을 보게 됐는데 학교 강의만 허용하고 때로는 외부출입도 제한하고 사무실에서 먹고 자기도 했어요.』
분과위원 외에 고문으로 위촉된 인사들에겐 상당한 예우를 했던 것 같다.
당시 기획위원장 고문이었던 최호진 씨의 증언.
『지금도 살고있는 나의 신당동 집이 박정희 소장의 자택과 바로 이웃해 있어 혁명 전부터 박 소장을 알고 있었어요. 5월 27일로 기억되는데 최고회의로 나와달라는 연락이 집으로 왔어요.
나더러 경제분야를 맡아 자문을 해달라고 해요. 그래서 그날부터 매일 나에게 지프를 배정해주어 출퇴근을 했어요. 기억은 안 나지만 매월 활동비를 약간씩 받은 것 같아요.』
초기엔 얼마간 정책반영이 되었으나 차차 빛을 잃어갔다.
기획위원장이던 함병선씨(당시 중장)의 증언.
『해외 여행 중 5·16소식을 듣고 18일 귀국했더니 공항에 나온 국방대학원 참모들이 국가기획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고 합디다. 바로 사무실로 왔지요. 장도영 총장과 박 소장이 찾아왔더군요.
박 소장이 「기획위원회는 국가의 모든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선배님께서 맡아주셔야 겠읍니다」고 합디다.
최초의 기획위원회의 분위기는 자유스러웠읍니다. 토론도 격렬했고 K모 교수는 「군인이 현실을 어떻게 아느냐」고까지 얘기할 정도였으니까…. 최고회의와의 충돌도 있었지요. 농어촌 고리채 정리법에 대해선 「그건 법으로 해결이 안 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어요.
국가재건 비상조치법 때도 조순 교수 같은 이는 「국가비상조치법으로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장악하는 건 우방의 신뢰에 문제가 있다」고 했어요.
가끔 이 같은 반론이 있자 최고회의 측에서 「하라는 일은 안하고 탁상공론만 한다」고 압력이 들어옵디다.
당시 나는 계급의 존엄성이 희미해져 가는 것 같아 심각하게 걱정했읍니다.
장성급들도 최고회의 위원인 대령·중령에게 경례를 붙이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요.

<언어 정화법도 나올 뻔>
나는 박 소장에게도 경례를 붙이지 않았습니다. 이 같은 나의 태도가 그들로서는 불만스러웠을는지 모르지요. 그 후 부정축재 장성의 혐의를 받고 위원장직을 떠났읍니다. 재판과정에서 무혐의로 풀려나긴 했지만….』
혁명초기에는 비교적 이들 민간인 참여교수들의 자문을 많이 받았으나 최고위원들이 어느정도 물리를 알고 나서부터는 특별한 활동이 없게됐다.
기획위 멤버였던 전직 교수 A씨의 증언내용.
『6월 말께 입니다. 농림부차관이 찾아와 「농어촌 고리채 정리법안」을 내보이며 <법안이 제대로 됐는지 좀 봐주십시오> 하더군요. 나는 보기도 전에 <농어촌 고리채가 수 백년 내려오는 한국의 폐습인데 일개 법률로 해결이 되겠느냐>고 핀잔 조로 물으면서 <헌법이 살아있다면 그것은 사유재산권에 대한 침해>라고 지적했어요.
그랬더니 대뜸 농림차관이 <정책적인 문제는 우리가 걱정할 문제이고 교수님은 법조문과 체계가 제대로 짜여있는지의 여부만 봐주십시오>라고 하더군요.
할 수 없이 한번 쭉 훑어봤더니 별무리가 보이지 않아 그대로 돌려보냈지요. 매사가 이런 식이기 때문에 당시 참여했던 교수들은 정책결정에 큰 영향을 준 것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사실 이 때 교수가 하도 많이 혁명정부에 참여해서 밖에서 보기에는 「교수정치」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교수들이 이처럼 많이 참여한 것은 혁명정부가 지식인의 호응을 받고 국민적인 혁명으로 끌어가는데는 1차적인 효과가 있었지만 혁명정부의 숱한 시행착오는 바로 교수들 때문이라는 비판도 없지 않았다.
현실정치에는 경험도 없는 교수들이 정책수립이나 행정지도에 깊이 참여할 경우 현실을 무시한 이론에 치우칠 우려가 없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교수들이 참여함으로써 최고위원들의 잘못된 생각이 시정되는 실례도 없지 않았다.
망시 참여했던 B씨의 증언.
『최고회의가 3권을 쥐고있어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일 외는 못할 것이 없다는 평을 들을 때였지요. 「○○법」이니 「××법」이니 해서 막 만들어낼 때인데 하루는 그 「언어정화법」이란걸 만든다고 하더군요. 고운말쓰기를 법으로 정한다는 얘기지요.
때마침 내가 어느 일간신문의 논설위원을 겸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어는 교육을 통해 정화시켜야지 법률로 정화시킬 수는 없다>는 내용의 사설을 썼어요. 며칠 후 당시 문사위원장이던 K씨가 호출을 해서 갔더니 <당신이 이따위 글을 썼다는데 계속 그러면 재미없소>라고 언짢은 말투로 추궁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최고회의 자문위원 자격이 아니라 교수가 학자적 양심에서 의견을 말했을 뿐>이라고 설명했지요. 그 때 마침 나와 같이 최고회의에서 일하고 있던 왕학수씨(당시 고대 교수)가 곁에 있다가 <이 분이 고의로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고 감싸주더군요. 내가 쓴 사설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언어정화법」은 심의과정에서 유산되고 말았지요.』
참여했던 교수 중 일부는 중용 되어 중대한 일을 맡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거의 맡은 일이 없었으며 심지어 어떤 교수는 6개월이 넘도록 담당 최고위원을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정책연구실로 흡수>
그러던 기획위원회는 최고회의의 활동이 본궤도에 올라서면서 흐지부지되어버리고 김종필씨가 만든 정책연구실이 활발한 활동을 하게돼 많은 교수들이 연구실로 흡수됐다.
당시의 주요멤버들은 윤천주·김성희·계종극·정범모·윤태림 교수 등과 김학렬(전 부총리) 김정렴(전 대통령 비서실장)씨 등.
이들 중 김정렴씨는 그 이듬해 6월 단행된 화폐개혁에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며 ▲정당법 윤천주 ▲선거법 김성희 교수 등이 맡았다.
참여한 교수들 중에는 순수한 학문적 발상에서 이론적인 논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헌법학자들과 정치학자들간의 이견이 특히 심했다.
당시 정치입법에 참여했던 C씨(전 서울대 교수)의 증언.
『정당법을 만들 때로 기억됩니다. 정당 난립을 막기 위해 법정지구당수를 선거구수의 2분의 1로 초안을 만들었더니 헌법학자들이 결사의 자유를 제한한다해서 반대하더군요. 교수들끼리 끝내 결론을 내리지 못해 결국 박정희 의장의 중재로 3분의 1로 완화를 했지요. 헌법학자들이 너무 이론적인 면에만 치중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우리 정치학 교수들은 <우리나라가 언제 헌법이 부실해 민주주의를 못했느냐, 그 운용이 문제>라고 지적했지만 통하지 않더군요.』
헌법을 초안할 때는 교수들이 박 의장과 구체적인 조항하나를 놓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다음은 C씨의 증언 계속.
『장충동 의장공관으로 헌법초안을 갖고 갔을 때입니다. 때마침 박 의장은 정종을 들고 계시더군요. 우리가 <대통령 임기는 4년으로 하고 1회에 한해 연임토록 했다>며 3선 금지를 설명하자 박 의장은 <교수들이 두 번만 하게 하자고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도 더 하려다 망했는데 6년으로 하여 한번만 할 수 있게 하면 어떠냐>고 의견을 제시했어요.
그러면서 박 의장은 <하기야 나는 다시 군으로 돌아갈 터이지만…>라고 말끝을 흐리더군요. 61년 말의 일이니까 그 때까지만 해도 박 의장 자신은 민정참여 결심을 안 했던 것 같았습니다. 박 의장의 이 같은 단임제 주장에 우리는 <8년을 하게 되더라도 중간에 심판을 받으니 괜찮읍니다. 부적격한 사람이 6년씩이나 하게 되면 더 문제가 아닙니까>라고 설득해 원안대로 됐어요.』
기획위원회와 정책연구실이 앞날의 정책구상이었던데 비해 당면시책은 최고회의가 양산해 냈다. 최고회의는 정권인수 후 각 부처의 계획사업을 모조리 걷어가 채택할만한 것은 그대로 집행해 밀고 나갔다. 혁명 공약이 제시한 기아선상의 민생해결은 그들에겐 최우선의 과제였다.
이미 성안돼 있고 공약에도 꼭 맞다고 해서 혁명 9일만에 전격 단행된 농어촌 고리채 정리가 그런 대표적인 케이스다.
농어촌 부채 정리는 자유당 때의 숙제, 민주당 정부에 들어 법안이 성안됐다. 문제 제기에서 그 집행까지를 증언으로만 엮어보자.
『문제 제기는 58년 농업은행의 농촌부채 조사였다. 이것이 정치문제화 되자 자유당은 영농자금을 풀었지만 채권이 빈약해 「막걸리 자금」이란 대명사에 그쳤다.』(당시 농은 이사였던 박동규 해외건설협회 회장의 증언).
『60년 가을이니까 민주당 내각성립 직후지요. 김성규 사무차관이 농어촌 고리채 정리법을 만들라고 해 꼬박 1주일 밤샘을 해서 만들었습니다.』(당시의 농정과장 오태성씨 증언).

<중농정책 흐지부지>
김성규씨(당시 농림 차관)의 회고. 『혁명이 나자 집에 들어앉았죠. 그런데 장경순 장관 부임 전 농림부를 접수한 김모 대령이 권총을 찬 채 집을 찾아왔어요. 잡으러 온 줄 알았지요. 김 대령은 사무실에 나가 농림부 업무를 설명하라는 것이었죠. 고리채 정리는 혁명정부의 뜻에 맞는다고 합디다. 나는 7월까지 재직하면서 김유택 당시 재무장관에게 3백억 환의 영농자금 요청까지 하고 물러났읍니다만 이 계획이 성공하지 못해 지금도 섭섭합니다.
그 때 박 의장도 자주 농림부에 들러 브리핑을 받고 <농민을 살려야 하며 혁명정부는 중농정책을 할 것>이라고 했으나 얼마안가 식어지더군요.』
최고위원 유원식씨의 회고.
『혁명직후 박 소장이 부르더니 느닷없이 농어촌 고리채 정리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문제가 많을 것이라고 했더니 초안을 주면서 나에게 고쳐보라고 합디다. 법안을 보니 연이율 2할 이상을 고리채로 규정하고 채권행사를 일체 중단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지불정지에서 일정한 기간 안에 임의 지불하도록 고쳤지요. 그런데 5월 25일 발표는 원안 그대로 됐읍니다.』
민주당 정권의 농림부 정무차관이던 김기철씨(현 국회의원)는 『고리채 정리는 장 총리가 방미성과로 가져올 원조금이 재원이었는데… 재원부족으로 실패했다』고 진단 했다.
어쨌든 최고회의는 역대정권이 숙제로만 했던 전력 3사의 통합 등 경제정책을 의욕적으로 밀어 붙였다. 그러나 군정이 2대 과업으로 내세웠던 농어촌 고리채 정리와 화폐개혁이 종국적으로는 실패에 그친 것 등 힘에 의한 경제운용은 예상치 못한 부작용과 많은 후유증을 남기게 된다는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