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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팔레비의 종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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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묵살된 현지보고>
78년 여름 미국정부의 공식적인 견해는「팔레비」국왕이 이란국 내 정치에 자유화조치를 취함으로써 국내의 반대파를 성공적으로 무마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테헤란주재 미대사관 직업외교관들의 견해는 정부의 공식견해와는 달랐다.
많은 이란 인들을 직접 만나본 중견 외교관들은「팔레비」의 통치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다는 보고서를 냈으나, 그러한 비관적인 전망은 당시 미국의 정책을 이끌어가던 낙관적인 입장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78년6월 이스파한(주=이란 제4대도시) 주재 미국영사관의「데이비드·맥가피」영사는『이란국민들은「팔레비」국왕이 국민의 불만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 알지 못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고 정세보고를 했다.「맥가피」영사가 이 정세보고를 낸 시기는「팔레비」가 왕위에서 축출되기 9개월 전 이었고, 테헤란주재 미국대사관이 이란 사태가 불길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완전히 파악하여 보고서를 내기 수개월 전이었다.
대사관의 보고서는『「아야툴라·호메이니」는 이스파한 시장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스파한 지역 안의 많은 회교지도자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고 있으나「호메이니」가 대중의 폭 넓은 지지를 받고있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투자가·공장주·노동자들 중에도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고 기술했다.
한 비밀문서는 78년6월5일에 소집된 이란 각지 주재 미국 영사회의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스파한 주재「맥가피」영사는 이스파한 지역의 반「팔레비」활동에 관한 동향을 보고했다.
나중에 회교과격파 학생들에게 인질로 잡혔던 타브리즈 주재「마이클·메트린코」영사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티브리즈 지방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주민들은 페르시아 말을 쓰지 않는다. 아저바잔 지방(주=카스피 해안 안에 있는 소련 방 구성 공화국의 하나)의 역사는 정치적·종교적 분리주의의 역사다. 지방정부는 사실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며 아저바데간 대학의 경우 16주간의 수업 중 겨우 4주일간만 수업을 했을 정도다. 78년5월초의 대학생 피살사건으로 교직원들이 반정부로 돌아섰다.
타브리즈 같은 보수적인 지방에서는 학교가 가장 큰 세력이다. 주민들은 생활의 즐거움이나 오락을 학교사원에서 얻고 있다. 사교장소나 극장 같은 곳이 폐쇄됐기 때문이다.「파라」 왕비는 그 가족들로부터 경멸받고 있다. 일부에서는「팔레비」왕이 타브리즈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에 대해 충분히 보고 받지 못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탄압완화 권유도>
이란 남부지역에 주재하는「빅터·톰시드」영사(주=역시 나중에 인질로 잡혔다)는『이란의 현대화계획(성=「팔레비」왕이 주도한 백색혁명) 실시로 야기된 전국민의 불만이 서서히 표면화되고 있다. 이란 국민들은 이란의 현대화가 국민의 전통적인 귀속감을 잃게 한다고 비판한다. 만약 현대화 계획이 달성된다면 정치적 자유화 요구도 언젠가는 뒤따르게 될 것이다』라고 보고했다. 영사회의 보고서는『미국이 페르시아 문제 때문에 속죄양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지적했다.「팔레비」왕을 둘러싸고 일어난 반대파의 움직임에 관한 이와 유사한 자세하고 정확한 보고서가 78년 여름과 가을동안 잇달아 제출됐다. 그러나 당시 「월리엄·설리번」미 대사가 서명한 미국대사관의 공식보고 전문은 78년 말까지 낙관적인 견해만을 표명한 것이었다.
격렬한 가두시위와 파업사태가 계속되어 사회적 무질서와 경제적 혼란상태가 휩쓸자 마침내「팔레비」왕은 79년1월 이란에서 탈출했다. 78년 이란 안에서 중요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미국 관리들은「팔레비」왕이 정치적 반대파들에게 더욱 자유스런 정책을 취하도록 압력을 넣거나 아니면 무력으로 진압하도록 했다.
「팔레비」왕은 점차 정적 완화조치를 했으나 반대파의 시위는 더욱 광범위해지고 격렬해졌을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듯이 결정적인 전환점은 78년9월8일 잘레 광장에서의 대학살 사건이었다. 당시 테헤란 남부 잘레 광장에는 약2만 명의 반대파들이 운집하여 종교집회를 가진 끝에 새로 실시된 계엄령에 반대하는 합의 데모를 벌였다.
집회시작 1시간쯤 지나 군중은 해산명령을 받았으나 거부했고, 이에 이란 육군부대가 출동해 군중에게 발포했다. 결국 이 사태로 수백 명이 피살되고 수천 명이 부상했다.
비밀문서들은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측이「팔레비」가 계엄령을 선포하도록 종용했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 문제에 관해서 대사관측이 워싱턴 당국과 협의안 증거는 나타나지 않아 있다. 이란 어를 구사하는 대사관의 정치담당관리「존·스탬펠」씨가 작성한 비망록은 계엄령 선포 나흘 전인 78년9월3일 저녁「바크티아르」신임수상의 보좌관「다리우스·보이안· 도르」와의 회합 내용을 담고있다.
「보이안·도르」는「스템펠」에게 물었다.
『우리 정부가 강경책으로 저들과 대결한다면 어찌 할 것 같습니까? 무력으로 질서를 회 복 하고자 할 경우 미국정부는 어떤 태도를 보이겠소?』그때까지만 해도 이란 군은 시위군중과의 충돌을 피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이 같은 질문에 대해「스템펠」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적고있다.

<무력사용을 요청>
『미국정부는 인권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인권을 위해서라면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혼란이 와도 좋다는 입장은 아닙니다. 내 사견을 말한다면 이란정부의 질서회복 노력이 다양한 사회세력에 충분한 정치참여의 기회를 주겠다는 생각아래 취해진다면 우리정부도 동정적인 태도를 보일 것입니다.』
「스탬펠」은 또『미국대사관은 수상이 매우 어려운 상황을 맞았다는 점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질서유지를 위한 정부의 무력사용이 도를 넘지 않도록 자제해 주기를 바랍니다. 무력사용에 관한 정치적 해명이 제대로 돼야 미국이나 유럽국가의 친 이란인사들이 이란을 옹호해주기가 편할 겁니다.』
이란정부가 무력사용에 관한 미 정부의 묵인 내지 비호를 요청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스탬펠」이「보이안·도르」와 만난 지 나흘 뒤 이란수상실의 보좌관들은 회합을 갖고 계엄령선포를 결정했다.

<팔레비 전폭 지지>
잘레 광장사건 후「설리번」대사는「팔레비」정권의 온건파인사들 및 군 고위간부들과 만나 이란정부내의 분위기와 정책방향을 타진해 보았다. 당시「설리번」은 본국에 친 전문에서 이렇게 보고했다.『현 상황에선 미국정부가 핵심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왕에 대한 영향력은 이란정부보다도 미국이 더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같은 영향력을 십분 이용해야할 것이다)「설리번」은 또『예기를 나누는 동안 군 고위장교들은 앞날에 대한 불안감을 나타냈다. 그들은 테러 및 파괴활동, 파업 등이 벌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번 반정부시위의 규모나 조직력에 크게 충격을 받았음이 틀림없다』고 쓰고 있다.「팔레비」는 미국이 자신과 자신의 정부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어떤 조치를 취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예전보다는 조리 있는 상황대처방안을 마련했다. 그는 퇴위나 도피 같은 행동은 전혀 고려치 않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론 지금 맞은 상황의 심각성은 부인하지 않았다.』
「설리번」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군이나 내각 안에는 아직도 반대세력에 대한 강력한 탄압을 주장하는 강경파들이 건재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맞서 압제수단은 효과가 없을 것이며 대중의 합법적인 불만을 풀어줄 조치가 하루 빨리 취해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
『지난 몇 주일동안 왕은 마치「햄리트」처럼 우유부단한 자세를 보였다. 그는 강경·온건 어느 쪽으로도 뚜렷한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그는 예전의 자신감을 약간은 되찾은 듯하다는 자신이 개혁파들의 주장을 지지했다고 말했는데, 빈말은 아닌 듯 싶다. 개혁조치가 차차 취해질 것으로 기대해도 될듯하다.』
잘레 사건이 터진지 얼마 뒤「카터」대통령은「팔레비」에 대한 전폭 지지를 재 천명 했 다. 그는 캠프데이비드에서의 이스라엘-이집트 평화협상을 잠시 멈추고「팔레비」에게 전화를 걸어 지원을 다짐했다.
며칠 후 이란주재 미 영사인「롬세드」는 이란 국민사이에 반미감정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고 보고 해왔다.
78년9월21일까지도「설리번」대사는 본국에 낙관적인 보고를 보내고 있었다.
『정부는 설득력 있는 자유화 움직임을 보임으로써 지지기반을 넓히고 민주화를 지향하는 정치단체들이 통치과정에 한몫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 줘야 한다. 또 현 체제 타도를 부르짖는 반정지도자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달래야 한다.』
10월19일에도「설리번」의 보고는 계속 희망적이다.
「설리번」은 이 보고에서 다음해 6월로 예정된 총선거 때까지 몇 번의 위험한 고비는 남아있다고 말하고「호메이니」옹의 세력에 대한 종전 보고내용을 다음과 같이 수정했다.

<반대파 체포압력>
『「호메이니」의 세력은 이제 내리막길에 접어든 것 같다. 그가 프랑스에서 발표한 성명들은 그의 정치감각이 혼미하고 낡았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가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기독교 국가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도 영향력이 기우는 한 요인일 수 있다.
이곳 곰 시의 아야툴라(회교적 최고위 성직자)들도 예전보다 자신감이 강해진 것 같으며 정부와 타협중이다.
「설리번」대사의 말은 계속된다.『군부지도자들은「팔레비」왕이 너무 많은 양보를 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고 그같은 사실을 비밀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훨씬 더 거친 조치를 취하기를 좋아했는데 반대파들을 체포하고 법과 질서를 더욱 존중하드록 강요했다. 그들은 이 같은 점을 계속해서「팔레비」왕에게 간청했다]
한편 앞의 기록에 따르면 바로 이 시간 워싱턴에서는「아르드시르·자헤디」주미 이란대사 등이「팔레비」왕에게 압력을 가해 강경 조치를 취하도록 해달라고 백악관에 요청하고 있었다.
그들의 요청은「사이러스·밴스」국무장관이 이란주재 대사관에 보낸 전문내용에 나타난다. 이 전문의 제목은『전망』 .
『우리는「팔레비」왕의 정치적 화해정책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으므로 왕은 반대파들에 강경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영향력 있는 인사들의 주장을 듣기 시작했다.

<급속히 변한 여론>
이 조치는 질서를 회복시키기 위해 파업 노동자들을 작업장으로 돌려보내고 길거리에서 시위하는 군중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아마 이 강경 조치는 언론과 대학의 탄압, 그리고 수많은 반체제 민간인과 성직자들의 체포를 수반할 것입니다. 우리는 4백 명의 반체제인사만 체포되면 반체제 조직은 무너질 것으로 현지 정보요원들이 믿고 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읍니다.
이 같은 정책평가와 함께 장기간의 철저한 통제하에서의 군부와 비밀경찰의 충성도, 그리고 있을 수 있는 이란국내의 정치세력들의 반응과 총선이 연기될 때의 국민들의 반응에 대한 평가와 분석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그 주일에「설리번」대사는 대사관 직원에게 더 넓은 층의 이란시민들을 만나 여론을 들을 것을 요청했다. 한 모임에서 2명의 이란 신문기자는 다음과 같이 정세판단을 간단 명료하게 했다.
『호메이니」옹이 결정적인 변수이다.「호메이니」옹은「팔레비」왕보다 국민에게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생각은 대부분의 이란 국민들이 믿고있는 바를 대변하고 있다.』
10월30일까지 이같이 급속도로 변하는 여론은 그때그때 워싱턴으로 전달된다. 그리고 전주에 지시된 대로「밴스」국무장관의 단문에 대해 언급함이 없이 똑같은 제목 『전망』으로 「이란 국민여론의 변화」 라는 부제가 붙은 한 장의 단문이 워싱턴으로 보내졌다.
『지난달 특히 지난주에 일어난 사건들로「팔레비」왕과 이란 정부에 대한 이란국민들의 태도는 눈에 띌 정도로 바뀌어졌다. 짧은 안목으로 볼 때 의미심장한 그러한 변화는 특별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같은 변화는 이란 정치에 대한 사고방식과 믿음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현안문제들은 ▲이제까지는 최소한 묵시적으로나마 왕과 정부에 대해 복종을 표해온 집단들까지도「팔레비」왕 정부의 권능과 정통성에 대해 다시금 회의를 보이고 있으며 ▲현대화의 첨병 격인 중산층 사람들까지도 외교세력과 공산세력이 생각했던 것보다 횔 씬 뛰어난 조직능력을 갖고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으며 ▲현 지도층은 회교지도층과 타협할 수 없으며 그 결과 언제든지 군사정부가 들어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느낌이 급속히 퍼지고 있다는 사실 등이다.』

<호응과 접촉 촉구>
『군사정부가 구성되지 않고 질서가 회복된다손 치더라도「팔레비」왕이 계속 집권하려면 그 정도의 대책으로는 안될 것이라고 대부분의 이란 인들은 생각하고 있다. 20년만에 처음으로 새로운 정치체제의 가능성이 곳곳에서 진지하게 고려되고 있다.』
「팔레비」통치 마지막 10주일 동안에 작성된 대사관 보고서 가운데는「팔레비」출국이후 원만한 정권이양을 위해 당시 파리에 채재 중인「호메이니」와의 접촉을 촉구하는「설리번」대사의 보고서도 들어 있다. 그러나 「실리번」대사의「호메이니」접촉요구는 실현되지 않았다.
78년12월31일「설리번」대사가 국무성에 보낸 전문은「팔레비」왕이 정말로 곤란에 처해있는지를 문의한 국무성 전문에 대한 보고전문이다.「설리번」대사는 보고전문에서 테헤란 외교 가의 분위기를 전하면서『프랑스 대사관의 입장은 이제「팔레비」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며「팔레비」국왕의 출국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다.「설리번」대사는『외교 가의 공통된 견해는 법과 질서가 이미 허물어졌으며 만행과 외국인 혐오감정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 현재 이란사태는 무정부 상태로 줄달음치고 있다』고 전문을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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